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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
크리스토프 바우머Christoph Baumer | 안경덕 |
가격: 45,000원
쪽수: 568
발행년/월/일: 2016.08.18
크기: 4*6배판 변형
ISBN: 978-89-337-0717-3 03230

한국어판 서문/옮긴이 서문/옮긴이 해제

추천사
1장  서론
아시리아 동방교회 약사
종교적 영성 
‘네스토리안’이라는 용어 

2장  동방교회의 기원
유프라테스 강 양안 지역의 정치·종교 상황 
안디옥의 바울과 초대교회
유프라테스 강을 건넌 기독교 
인도 남부의 도마 기독교인들 

3장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교부들과 이단자들
삼위일체 개념과 그리스도 본성 문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
동방교회의 신학적 기초  
네스토리우스와 에베소 공의회 

4장 보편성을 상실한 기독교
칼케돈 공의회 
비잔티움제국 내부의 신앙논쟁과 동방교회에 끼친 영향
시리아교회들을 하나로 묶은 『페시타』 성경

5장  셀레우키아·크테시폰 총대주교구
사산조페르시아 초기의 정치·종교 상황
사산조페르시아 때의 조로아스터교 
한 세기 넘게(340~457) 지속된 순교와 처음 만들어진 교회계급제도
동방교회 조직
독립을 선언한 동방교회
복합단성론자와의 논쟁
450~650년 동방교회에 닥친 위기와 쇄신
시리아정교회의 대두

6장  동방교회의 신학과 영성
조로아스터교ㆍ마니교와의 싸움
성선설과 원죄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 생명나무와 부활의 십자가
동방교회의 성례전
교회건축과 예배―공간과 시간 속의 상징들
수도원제도와 금욕주의
동방교회 신비주의의 귀감, 달리아타의 요한
 
7장  무슬림 치하의 기독교인들
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의 기독교인들
관용과 억압 사이에 끼게 된 기독교인들
동방교회의 전성기: 총대주교 디모데 1세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고대 유산의 보존
동방교회와 이슬람
동방교회는 우상을 반대하는가?

8장  동방선교
중앙아시아 비단길을 따라간 동방교회
알로펜 주교가 경교를 중국에 전하다
불교·도교와의 대화

9장  몽골인들의 시대
샤머니즘과 종교혼합주의
기독교 부족들
몽골에 찾아온 가톨릭교회 수사들
몽골의 동방교회 교인 왕비들과 고위 관리들 
십자가와 연꽃: 중국 동해안에서 발견된 기독교와 불교 상징물의 합성 
몽골 일칸들 치하에서 맞은 이란 지역에서의 마지막 융성기
몽골 일한국과 유럽의 동맹 기회 
라반 사우마와 라반 마르코스―아시아에서 온 동방교회의 ‘마르코 폴로들’
티무르가 저지른 파괴와 산악지대로의 피난 
 
10장  인도 남부의 도마 기독교인들
말라바르 해안의 동방교회 공동체
가톨릭교회로 강제 개종당한 동방교회 교인들
도마 기독교인들의 봉기
인도 동방교회의 재건

11장  시련과 분열의 시대
칼데아교회의 성립
총대주교들과 대립 총대주교들 
20세기까지 오스만제국의 정치 상황과 칼데아 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러시아정교회·개혁교회의 선교사들
1915~1918년의 집단학살
짓밟힌 희망
동방교회의 붕괴 원인

12장  아시리아 동방교회의 르네상스 
망명지에 다시 세운 교회
21세기의 아시리아인들: 전망
동방교회의 정체성
세계 기독교의 통일을 위한 대화
동방교회와 그 신학의 타당성

주/참고문헌/부록/자료 출처/찾아보기

유럽에서 기독교라고 하면, 대체로 서방교회의 주요 분파인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칭한다. 때로는 그리스정교회를 포함하기도 하는데, 교회사가들 가운데는 그리스정교회를 편의상 동방교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동방교회(Assyrian Church of the East)는 가톨릭교회, 그리스정교회와 뿌리를 같이하지만, 그리스정교회와는 엄연히 다른 종파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종파 중의 하나이다.
동방교회는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네스토리우스교(네스토리우스파교회)’ 또는 ‘경교景敎’로 알려져 있다.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부터 중동에서, 또 실크로드를 통해 대초원지대와 인도, 중국까지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쳐 한때 동서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황해까지, 남북으로는 바이칼 호수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너른 지역에 많은 교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지니고 막강한 교세를 떨쳤던 기독교 분파가 오늘날 그 존재조차 희미해질 만큼 미약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이 동방교회 이야기를 담은 크리스토프 바우머Christoph Baumer의 『The Church of the East』의 한국어판으로 독일어판, 영어판, 아랍어판에 이어 네 번째 언어로 출간되는 것이다. 스위스의 탐험가이자 저술가인 바우머는 교회사와 문명사에서 동방교회가 가지는 중요성을 충실한 자료 조사와 꼼꼼한 현장 답사를 통해 재조명하였다.


동방교회의 기원
종교와 문화의 밀접성으로 볼 때, 정치제도와 문화적 전통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비록 뿌리가 같은 종교라 할지라도 그 방향성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벌어지면서 분파작용이 일어났다.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양성론과, 예수는 신성 또는 인성 어느 하나만을 가졌다는 단성론이 교회를 갈라놓았고, 한 주장 안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을 경우 또 다른 분열을 낳았다. 단성론을 주장하는 분파들로는 시리아정교회(야곱파교회), 이집트 콥트교회, 에티오피아정교회, 아르메니아교회 등이 대표적이다. 양성론을 주장하는 분파는 크게 제국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제국교회는 나중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짐에 따라 로마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로 갈라진다. 또 16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파한 개혁교회(개신교)도 양성론을 따르고 있다. 같은 양성론을 주장하지만, 제국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으니 하나님의 어머니가 된다고 하여 사실상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인간 예수를 낳았다고 하여 예수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폄으로써, 마리아의 위상을 놓고 두 교회의 신학적 관점이 크게 엇갈렸다. 제국교회에서는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을 펴는 교회들을 이단으로 간주하였고,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골이 생겼다. 결국 동방교회와 제국교회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서방교회에서는 지금도 동방교회를 자기네 기준에 맞추어 정죄한, 이단 네스토리우스에 빗대어 네스토리우스파교회라고 폄하해 부르고 있다.


동방교회의 발전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4세기 말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북유럽, 영국, 아일랜드뿐 아니라 11세기 이후에는 스칸디나비아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또한 그리스정교회는 11세기에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후 비잔티움제국의 국교가 되어 동유럽, 소아시아 등 동지중해 연안과 러시아로 뻗어 나갔다.
동방교회는 로마제국의 동쪽으로 전파되었는데, 한때는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쳐 기독교 역사상 가장 광대한 지역, 즉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까지 교세를 떨쳤다. 10~14세기에는 동방교회 교인들이 전 세계 기독교인의 12~16%를 차지했다고 한다. 기독교 분파 가운데 최초로 중국에 진출한 동방교회는 7세기부터 당나라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크게 융성하였다. 경교는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흔적이 지워졌으나 유목민들의 종교로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13~14세기 몽골제국의 발전에 따라 중국과 이란을 잇는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몽골제국의 황비들 대부분이 동방교회 신자였다.
동방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워 그리스 고전을 발굴·연구하였으며, 칼리프 시대에 바그다드 대학의 책임자는 동방교회 교인이었다. 동방교회는 시리아어를 공용 의전어로 삼았는데, 자칫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그리스 고전과 과학·의학 유산을 시리아어로 번역하였고 이를 다시 시리아어에서 아랍어로 번역함으로써 이슬람 문화 발전의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이후 에스파냐의 톨레도 대학을 통해 이 위대한 유산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소개됨에 따라 르네상스의 또 다른 토대가 되었다. 중세 가톨릭 신학의 근간을 이루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신학체계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보존, 발전시켰던 동방교회의 덕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동방교회의 약화
한때 서방교회와 자웅을 겨루던 동방교회는 그 발원지인 중동에서 7세기에 이슬람이 성립한 후 끊임없이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받아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최근까지도 이라크에서는 이슬람 근본주의를 앞세운 사담 후세인의 격심한 탄압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추방당하기도 하였다. 16세기 인도에서는 동방교회의 지교회支敎會인 도마교회가 대항해 시대에 선교를 목적으로 온 가톨릭 근본주의자들의 끈질긴 개종 압력을 받았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은, 어느 종교에서나 또 어느 시대에나 종교적 분쟁, 살인과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동방교회는 근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기독교였다. 이런 기독교의 분파를 기독교 역사에서 이단으로 취급하고 지워버린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동방교회는 20세기에도  교인들이 집단학살을 당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미국에 망명교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현재 이라크, 이란, 시리아 북동쪽, 서유럽과 미국 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벌이고 있다.


이 책은 동방교회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의 궤적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면서 고유의 교의 및 그리스도론, 독특하고 활력에 넘쳤던 영성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다른 기독교 종파들과의 갈등 및 교류를 상세히 서술하고 있으며, 선교과정에서 마주쳤던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 불교, 힌두교, 도교 등과의 교감도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은 것으로, 그 이후 파괴된 유적들도 다수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서방교회 편향으로 기독교 역사를 기술하고 있으며, 일반 역사가들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동방교회의 존재나 역사적 가치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역자는 현대에 와서 동방교회의 교세는 미약하고 그 존재감조차 희미하지만, 동방교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은 교회사뿐 아니라 문화교류사 측면에서도 중요하므로 반드시 그 가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더불어 동방교회가 왜소화되는 과정은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사 연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부분이라고 강조한다.

<책 속으로>
서방이 동방교회와의 접촉을 배척한 결과 동방교회 스스로 동쪽으로 진로를 잡게 됐다. 바스라의 다윗David of Basra 주교가 295/300년 무렵 인도 케랄라Kerala에 있는 도마 기독교인들과 접촉한 것을 시작으로 동방교회 수도원 출신 선교사들이 아라비아 반도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 초원에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나섰다. 동방교회는 아랍 지역에 있는 교구들을 이슬람에게 빼앗기고, 또 중국에서의 첫 선교에서 쓴 맛을 본 후에 11세기부터 동방을 향한 선교를 새롭게 시작해 몽골족과 중국에까지 이르게 된다. 당시 동방교회 총대주교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황해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7세기에 아랍인들이 지중해 남부와 동부까지 손아귀에 넣자 동방교회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비잔티움제국이 다스리던 지역까지 서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14세기 초에 총대주교는 직할구 셀레우키아·크테시폰 대교구를 포함해 모두 27개 대교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대교구는 6개 내지 12개의 교구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 ‘1장 서론’ 중에서, 23~24쪽

신학적인 면에서 네스토리우스는 타협할 생각이 거의 없었다. ‘마리아는 한 인간, 신의 매개자를 낳은 것이지 하나님을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테오토코스라는 용어가 하나님이 출생·고통·죽음 같은 자연조건의 대상이라고 주장하는 데오파시스트파의 그리스도론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몹스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에서 시작된 ‘테오토코스’ 호칭을 신학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동방교회의 생각은 그 뒤로도 변함이 없었다. 동방교회의 마지막 위대한 신학자인 니시비스의 대주교 마르 오디쇼Mar Odisho(1250년 무렵~1318)는 이 개념을 신랄하게 논박했다. 첫째,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하고, 이 말을 삼위일체에 적용한다면, 마리아는 삼위일체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손자가 된다고 했다.
― ‘3장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교부들과 이단자들’ 중에서, 97~98쪽

8, 9세기는 동방교회의 황금기였고 또 새로운 아랍·이란 문화의 개화기였다. 당시의 바그다드는 이란·그리스·시리아·인도의 철학적·지적 유산이 새로운 문화적 합성체를 만들기 위해 국제적인 이슬람의 안내를 받아 모두가 모여든 용광로였다. 유럽이 야만주의 속으로 가라앉는 위험에 처했을 때 이 새로운 이슬람 문화가 고대의 보물들을 모아 보존했고 12세기가 되어서 그것을 지금의 에스파냐 톨레도에 있는 대학에 전수했다. 유럽의 르네상스 정신에 비견되는, 패기에 찬 이슬람 정신이라는 지적인 호기심이 없었다면 서방은 결코―혹은 적어도 그 후 비잔티움제국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간 후가 아니면―자기네들의 잃어버린 뿌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아라비아의 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옛 문자를 해독할 수 없었고, 그리스어도 몰랐기 때문에 동방교회와 시리아정교회 교인들에게 중간자적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학문을 무시했던 라틴인들과는 달리 6세기가 시작될 무렵 시리아인들은 열정을 가지고 그리스 학문에 매달렸고 그리스 원전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했다.
― ‘7장 무슬림 치하의 기독교인들’ 중에서, 287쪽

시안 근처에서 1623년 혹은 1625년에 높이 2.79m, 밑바닥 너비 99cm, 무게 2톤의 석비 하나가 발굴됐다. 다른 석비들처럼 세계질서의 안정을 상징하는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세워졌다. 앞면에 모두 1,800자의 한자가 쓰여있고 하단에 시리아 에스트란겔라 문자와 한자가 세로 23줄로 781년 2월에 세웠다는 간기刊記가 새겨져 있다. 비석 두 옆면에는 에스트란겔라 문자와 한자로 70명의 기부자 명단도 새겨져 있다. 앞면 상단에는 3쌍의 용들이 트림을 하면서 갈고리 발톱으로, 태양의 상징인 화염에 싸여있는 여의주를 잡아 쥐고 있는데, 그 밑으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9글자로 된 비명이 있다. 동방교회 십자가가, 구름과 두 나무 가지 사이에 있는 연꽃 위에 놓인 채 태양과 위에 있는 3개의 상징들 사이에 놓여 있다. 따라서 동방교회는 시각적으로도 도교와 불교와 연관이 있는 가운데 더 높은 자리인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 상황을 보면, 구름과 여의주는 도교에서 말하는 음양 원리이고, 연꽃은 나름대로 불교의 고전적인 상징으로 세속적인 존재라는 침침한 연못 위로 솟은 영적인 탑의 순정함을 보여준다. 이 장식은 동방교회 교인들 묘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부활의 십자가 안에 가득 차 있는 중국인들의 종교성을 암시한다. 이 비석이 발견되자 중국학자들과 유럽에서는, 이것이 중국에서 1583년부터 1610년까지 살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보다 거의 천 년 전에, 그리고 1294/1295년부터 1328년까지 중국(원나라)에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가톨릭 대주교 몬테코르비노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보다 700년 앞서 기독교가 중국에 이르렀다는 증거라 하여 큰 반향이 일었다. 
― ‘8장 동방선교’ 중에서, 327~328쪽

몽골제국 대칸 때와 원나라(1271~1368) 때에 동방교회는, 말하자면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다. 지배자들이 기독교에 호감을 보인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몽골의 군주들은 전통적으로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모든 종교에 해당되는 것이다. 둘째, 여러 세대에 걸쳐 칭기즈 칸 가문과 기독교를 믿는 돌궐족과 몽골족 사이에 맺어진 광범한 결혼동맹 때문이다. 셋째, 동방교회 교인들의 교육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특히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구유크·몽케 이 세 대칸들은 읽고 쓸 줄 아는 동방교회 교인들을 높이 평가했다. (중략)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치고 영향력이 컸던 몽골 왕비는 정복당한 케레이트 부족의 왕 토그릴의 질녀, 소르각타니 베키Sorqaqtani-Beki(1252)였다. 그녀는 칭기즈 칸의 아들 툴루이와 결혼했다. 그녀의 맏언니 이바카 베키Ibaka-Beki는 칭기즈 칸의 왕비가 됐고, 둘째 언니 베추미시 베키Bektumish-Beki는 칭기즈 칸의 큰아들 주치에게 시집갔다. 소르각타니는 대칸 몽케·대칸이며 원나라 황제인 쿠빌라이·그의 정적 아리크부케Arikboge·일한국 훌라구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주 유능한 여인으로, 1249년 오고타이 가문의 대칸 구유크가 죽자 1232년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남편 집안인 툴루이 가문에서 후계자를 잇도록 바꾸었고, 툴루이 가문을 이끌었다. (중략) 1310년 그녀가 죽은 지 60년이 거의 다 되어서 그녀에게 황후라는 칭호가 추증되었는데, 이때 수도인 베이징과 그녀가 묻힌 지금의 간쑤 성 장예의 교회당에서 동방교회 예전에 따라 종교의식이 거행됐다
― ‘9장 몽골인들의 시대’ 중에서, 384~385쪽

인도 남부에 사는 도마 기독교인들과 동방교회 사이에 첫 접촉이 이루어진 때는 300년 무렵이었고, 그 후 5세기 초에 도마 기독교인들은 루아르다시르Rew Ardashir의 이란 대교구로 편입됐다. 그러자 총대주교 이소야브 3세 Ishoyahb III(650~660)는 인도 교구들을 인도 대교구로 승격시켜 직접 관할했는데 16세기에는 대주교좌가 앙가말리Angamali에 있었다. 8/9세기에 만든 동판에서 보는 것처럼 도마 기독교인들은 인도 사회에 완전히 동화돼 있었고 자기 고장 통치자들로부터 완전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번영의 토대는 후추농장이었고, 퀼론Quilon 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무역도 활기를 띠었다. 9세기 초 퀼론은 인도 남서부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로 페르시아의 배들과 중국의 정크선이 정박하였고, 따라서 13세기와 14세기에는 이곳에 있는 동시리아인들과 중국 자이툰(취안저우泉州)에서 온 동시리아인들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졌다.
― ‘10장 인도 남부의 도마 기독교인들’ 중에서, 4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