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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재해와 유교국가
등록일 2007.02.28 조회수 1732    
 


김석우 지음 |2006.9.15 |신국판(152*224) | 328쪽 |20,000원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형성된 군현제, 관료제, 개별인신적(個別人身的) 지배 등 황제지배체제의 주요 특성들이 한대(漢代) 통일국가 시기 동안 어떻게 변모하고 정착되어 나갔는지는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의 관심거리 중 하나이다. 지은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재해와 황정(荒政)이라는 소재를 선택하였다. 황정이란, “기근(饑饉) 구제를 위한 정책, 흉년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인민을 구하는 정치” 또는 “기황(饑荒)을 진제(賑濟)하는 정령(政令)이나 대책”을 말한다. 즉 황정은 황제가 각 지방 정부를 통해 또는 지방 군현에서 독자적으로 재해 피해를 입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 또는 정치 활동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지은이는 자연재해와 황정을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설정하였을까? 전국시대에는 국가 간에 크고 작은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일어났더라도 이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ㆍ사회적으로 안정된 통일국가 시기에는 갑자기 찾아오는 자연재해와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안이 매우 중대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당장 『한서』, 『후한서』 같은 사료에서도 재해 문제와 황정의 당위가 빈번히 나타난다. 즉 전국시대에는 국가의 생존이 일차 과제였고, 이를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이 제도화될 필요가 있었다면, 통일국가 시기에는 지배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의 생존이 더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 국가의 통치 이념이 근본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교는 한대 중국인들에게 전제 황권의 틀을 강화하면서도 민본(民本) 정치적 이상을 지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논리체계였기 때문에 통일국가의 변화된 정치 환경에 가장 부합하는 이념이었다. 유교는 국가 권력을 신성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지만, 지은이는 또 다른 면을 강조한다. 민본의 이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 국가 권력을 비판하는 체제 비판적 성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재해와 황정은 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처럼 자연재해는 한 제국의 유교화 과정을 촉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동안 한대 자연재해와 황정사 연구가 이어져 왔으나 한대사의 전개 과정과 연관 지은 연구는 거의 없었다. 자연재해 문제를 통해 한대사를 조명한 연구서로는 중국학자 천예신(陣業新)의 『災害與兩漢社會硏究』(上海人民出版社, 2004)가 유일하다. 이 책은 한대사 연구에 있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

제1장 「황정 연구의 대상」에서는 한대 황정의 범주를 살펴보았다. 『주례(周禮)』의 황정 12조와 『서한회요(西漢會要)』ㆍ『동한회요(東漢會要)』에 기술된 ‘황정’ 조항, 송대 이후에 나온 주요 황정서들을 검토하여 한대 황정의 범주를 설정함으로써 연구 대상을 명확히 했다.
 제2장 「재해관과 자연재해」에서는 연구의 기초 자료인 자연재해 기사를 살펴보았다. 먼저 각 재해 기사의 신뢰도를 꼼꼼히 따져보았다. 사서에 실린 기사가 항상 사실을 서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 재해 기사의 내용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한대 자연재해만의 특성도 서술했다.
제3장 「황정론의 전개―『염철론』을 중심으로」에서는 한대 중국인들이 재해ㆍ황정 문제를 어떻게 보았으며 어떤 대안을 생각했는지를 유가와 법가의 관점을 비교해서 살펴보았다.
제4장 「재이론과 유교정치―전한 원제대를 중심으로」에서는 자연재해와 황정의 논의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고찰했다. 특히 ‘유교의 국교화’ 과정이 현저히 진행되고, 재해와 관련해 황제가 가장 많이 조서를 내린 시기인 전한 원제대를 연구 대상 시기로 삼았다.
제5장 「황정 체계의 형성과 군현제」에서는 한대 황정의 과정과 절차를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현 단위의 황정기, 특사 중심의 황정기, 군국 중심의 황정기, 특사와 군국의 통합적 황정기로 시기를 나누어 한대 재해 행정의 실상에 접근한다. 이로써 군현제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힐 수 있다.

 

책 속으로

역사에서 자연재해는 주로 왕조 말의 농민 반란을 가속화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일 정도로 이해되기 일쑤이다. 또한 자연재해와 같은 ‘우발적’ 요인을 역사의 구조적 이해에 개입시키는 것을 꺼리는 경향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재해ㆍ황정 문제를 구휼 정책의 차원으로만 한정한 탓도 크다고 본다. 그 결과 사서에 숱하게 등장하고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음이 분명해 보이는 이 문제가 정작 해당 시기의 역사를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배제되었다고 생각한다.
(59쪽)

『염철론』에서 법가가 공격하였듯이 유가는 가난한 서민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유가의 정치적 발언은 그들의 계급적 혹은 사회적 능력보다는 본질적으로 그들의 학문적ㆍ문화적 능력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점에서 유생들의 국가 비판이 법가 관료들과의 사상의 차이에서 촉발되었다는 설명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그와 같은 사상의 차이가 자연재해와 전쟁의 피해, 그리고 그로부터 제기되는 황정과 위민(爲民) 정책의 필요를 통하여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유생들은 가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하의 범람 피해가 집중되었던 관동(關東)(산동) 지방 출신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설령 곽광의 사주를 받았거나, 혹은 호족의 계급적 이익을 결과적으로 반영하였다 할지라도 『염철론』에서 보이는 것처럼 전면적이고 치열하게 법가 관료와 논전을 벌일 수 있었던 직접적인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스스로 목격하고 경험하였던 삶 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35∼136쪽)

유교의 정착이 자연재해라는 외부 환경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 책에서 논증하고자 한 중요한 주제이다. 또한 점증하는 자연재해와 긴급한 황정의 수요는 법가적 국가관을 의심하게 한 동기였다. 법가의 국가관 대신 국가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고 민본의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국가 이념이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이것을 선전한 사람들은 경학의 이념으로 무장한 명경지사들이었고, 그들은 통일 국가에 어울릴 만한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관료적 국가 체제에 유연함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통일 제국의 국가 체제는 관료적 지배와 도덕적 지배라는 두 축 위에 서게 되었고, 이것은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또한 황정의 수요는 군국 정부가 군정(軍政) 기구에서 민정 기구로 변하는 과정을 재촉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군국 정부의 규모를 확대시켰고, 이는 지방의 유가적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활동 무대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제국 전역에 대한 관료적 지배가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지배의 확대는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대 자연재해와 황정의 발달은 제국 체제의 변화, 즉 ‘제국의 유교화’ 과정을 촉진하였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259쪽)

 

지은이 소개

김석우金錫佑
1966년 서울 출생.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 한신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고, 현재 군산대학교 강사이다.
주요 논문으로 「杜預 左傳學의 政治的 배경―의 『春秋左傳補疏』를 중심으로―」(2004), 「魏晉時期 杜預의 年譜稿」(200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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