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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기원
등록일 2007.02.26 조회수 1594    



이정식 지음|2006.6.1|신국판(152*224)|496쪽|30,000원
 

한국 현대사 연구의 거목 이정식 교수를 통해 해방 전후 격동기,
대한민국의 기원을 읽는다!

지금 학계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해방 전후사에 대한 인식 문제이다. 논쟁을 촉발한 것은 2006년 2월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출간이다. 이 책이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 책에 대한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의 비판과 반박이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있다. 이 논쟁은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역사 인식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정치상황과 맞물려 들어가며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확인과 검증이다. 이 작업이 바탕이 되어야만 비로소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여기에서 사료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지은이는 1980년대 이후 많은 학자들이 해방 전후 한반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특히 분단과 분단의 고정화에 관한 일들을 미국의 탓으로 돌려버렸고, 소련은 미국의 결정에 따랐을 뿐이라는 억측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본다. 이는 미국정부의 문헌과 자료는 많이 접할 수 있었던 반면, 소련 자료는 거의 구할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의 영향이기도 하다. 또한 남한 학계에서 북한 연구는 특수 분야로 여겨져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이 한반도 정치에 미친 영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 결국 이러한 경향의 한국 현대사 연구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50년간 북한연구에 종사해온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는 이 책에서 그동안 축적한 연구 자료와 1990년대에 발굴된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 지령, 슈티코프(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수석대표)ㆍ레베데프(소련군 연해주관구 제25군사령부 정치위원)의 비망록을 바탕으로, 해방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미국ㆍ소련의 한반도정책, 그리고 그 정책이 북한과 남한의 정세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오랫동안 북한을 연구하며 쌓은 다양한 문헌자료, 특히 소련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독자들은 한국 현대사에 대한 좀더 객관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와 연관 지어 해방 전후 남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민족 지도자 4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의 정치적 궤적을 검토한다. 그들이 해방 전후기에 한 역할, 소련ㆍ미국의 정책과 이들의 정치활동과의 관계를 고찰한다.
해방 전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의 시기를 고찰하는 것은 지금  ‘대한민국’의 뿌리를 정확히 인식하는 작업의 시작이다. ‘대한민국’의 기원에 대한 역사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는 지금, 한국 현대사 연구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지은이의 연구는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질문의 해답을 제시할 것이다.
 
 
내용 소개

┃제1부┃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
제1장  1910년대의 국제정세
1910년대는 일본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이 활발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는 이후의 독립운동, 나아가 해방 전후의 정세를 이해하는 데 기초가 된다. 미국과 러시아의 중국을 에워싼 각축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은 일본의 가속화된 팽창주의를 반대한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과연 윌슨 미국대통령의 이상주의는 일본의 팽창주의를 막을 수 있었는가?
제2장  열강의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1937~1945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 임시정부뿐만 아니라 유럽 8개국의 망명객들이 세운 임시정부로부터도 인정 요청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의 총선거에 의해 설립된 정부만을 인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미국은 한민족의 통치능력을 의심하는 한편 한반도를 에워싼 중국과 소련의 각축을 염려하여 4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즉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임시정부는 승인할 수 없었다. 중국정부는 한때 임시정부의 승인을 추진했지만 결국 미국의 정책을 따랐다.
제3장  미소갈등과 남한에서의 좌우대립
한반도가 분할되고 분단이 고착화된 이면에는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남한의 정치인들은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조선공산당의 자주성 결여와 미숙성, 그리고 이승만의 강한 반공ㆍ반소反蘇의식이 좌우대립을 불가피하게 했는데, 과연 이 당시의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쳤다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인가? 남한에서의 좌우대립과 분단 고착화의 연관성을 살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4장  해방 직후 미국의 한반도정책 - 반공보루설과 ‘한국화Koreanization’ 정책 -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를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분단 점령을 제안했으나 아시아 대륙에 대한 전략을 세울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이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2년간 정책방향을 정하지 못하다가 마침내 철수를 결정했다. 미국이 대한민국 수립을 추진한 것은 한반도에서 손을 떼기 위한 방편이었다. 트루먼 독트린을 한반도에 적용하여 남한을 소련에 대항하기 위한 반공보루로 만들었다는 주장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제5장  스탈린의 한반도정책, 1945 - 냉전의 전개과정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
왜 스탈린은 1945년 9월 20일에 소련이 점령한 북한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 즉 단독정권을 수립하라고 했는가? 9월 12일부터 열린, 전승국들의 세력판도를 규정하게 될 런던회의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스탈린의 한반도정책을 바꾼 중대한 계기였다. 9월 초순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통일 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이 남아 있었지만, 런던회의 이후 한반도의 분단은 여지없이 고착되었다.

┃제2부┃해방 전후 남한정국
제6장  해방 직후 정치 지도자 4인의 성격 구성 - 이승만·김구·김규식·여운형 -
우리 역사에서 해방 직후의 과도기만큼 혼란스러웠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정치체제가 불안정하거나 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 제대로 잡혀 있지 못한 혼란스런 상황에서는 정치 지도자의 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해방 직후에 남한정계에서 활약했던 가장 중요한 한국 정치 지도자 네 명의 개성과 그들의 성장과정에 대한 고찰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해방공간의 사건들을 보다 역동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예비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제7장  흉악한 정쟁의 마당에 쓰러진 호걸, 여운형
‘실패한 정치인’에서부터 ‘기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여운형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과연 우리는 여운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여운형의 행적을 살펴본 다음, 해방 후의 정국은 소박하고 호방한 자유주의자 여운형이 나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고 분석했다. 좌익과 우익은 전쟁터에 나서는 군대처럼 완전한 준비를 갖춘 태세로 정쟁에 임했는데, 여운형은 그렇지 않았다.
제8장  해방 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1953년에 일어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랫동안 쌓여 왔던 강자에 대한 울분이 발로한 사건이었다. 이승만은 그전에 미국과의 관계에서 울부짖지 않을 수 없는 경우를 여러 번 당했기 때문이다. 그전의 사건들이 반공포로 석방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이승만이 취할 수 있는 행동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이승만과 미국의 관계는 한마디로 대결과 반목의 관계였다.
제9장  해방정국과 좌우합작
좌우합작운동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성공을 통해 통일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국내 추진세력의 의도와, 이들을 내세워 온건 좌우세력을 규합하고 미군정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겠다는 미국의 의도가 맞물려 추진되었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온건 좌우세력의 단합이라는 단계에서부터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미국정부 내에서의 한국경제 부흥계획 취소가 실패의 큰 요인이기도 했으나 소련군정의 적극적인 반대도 크게 작용했다.
제10장  1948년의 남북협상
이른바 남북조선 제정당ㆍ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에 개최된 '4김 회담’은 소련군정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각본에 따라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었고, 북한에 수립될 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였다. '연석회의’가 채택한 결의문은 멀리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공산당 정치국이 결정해서 내려 보낸 것이었다. 소련 수뇌부는 남쪽 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냉전을 위한 도구로 비하해 버렸다.
제11장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제기와 그 전개
미소관계가 날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었고 소련은 북한에서 공개적으로 단독정부 수립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정책을 따르지 않는 모든 인사들을 숙청해 버렸다. 반면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중국대륙에서의 사태를 관망하면서 표류하고 있었다. 과연 조선민족은 미소 양국이 화해하고 통일독립을 이루어줄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는가? 1905년에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아서 독립하여야 스스로 통일의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은이 소개

이정식李庭植
195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UCLA를 졸업하고 1961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UC Berkeley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로라도대학교, 다트머스대학을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교수, 부교수, 교수를 역임하였고, 연세대학교 용재庸齋 석좌교수(2000∼2001)를 지냈다. 현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국정치학회American Political Science Association의 최우수저작상Woodrow Wilson Foundation Award (1974), 제1차 위암학술상(1990)을 수상했다.
주요저서로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1963), Communism in Korea(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와 공저)(1973), 『金奎植의 生涯』(1974), Japan and Korea: The Political Dimension (1985), Syngman Rhee: The Prison Years of a Young Radical(2001), 『구한말의 개혁ㆍ독립투사 서재필』(2003),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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