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1805년 메흐메드 알리는 서른다섯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주의 합법적인 총독이 되었다. 4년 전 이집트에 아무 연고도 없이 온 그는, 투르크어 방언 하나와 아랍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알았을 뿐 이집트 사람 대다수가 사용하는 아랍어는 거의 말할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제국의 수도에 출세를 도와줄 후원자도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더욱이 3년간의 프랑스 점령하에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리고 여러 집단(프랑스, 영국, 맘루크, 베두인 족, 예니체리, 알바니아 인 등)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황폐화되어 버린 땅에 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4년 만에 메흐메드 알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그는 프랑스와 영국 군대의 철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친구이자 동맹자였던 타히르 파샤가 암살되는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또 이 중요한 지역에서 줄줄이 세 명의 오스만 총독들이 이스탄불의 명령을 실행도 못 해보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이 계속 일어나면서 이방인인 메흐메드 알리는 점점 더 힘 있는 자리로 올라갔다. 메흐메드 알리는 알바니아 인 부대의 헌신, 카이로의 울라마와 상인들의 신뢰, 도시 내 민중들의 충성을 얻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비록 마지못한 것이었지만 이스탄불로부터 이집트에서 제국을 대리하는 적법한 대표자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 61~62쪽 ― 맘루크들을 제거하고 나서 바로 메흐메드 알리는 이스탄불에 긴 서신을 보내, 자기가 한 일이 마치 이집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 하는 술탄의 오랜 소망을 실현한 것인 양 설명했다. 그는 수도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고 자신이 점점 더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과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더 이 미묘한 균형 잡기를 해낼 수 있을까?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스탄불이 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 이러한 운용의 묘를 발휘하도록 놓아 둘 것인가? 1807년 오스만의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셀림 3세를 퇴위시키고 결국은 목숨까지 빼앗아 갔는데, 이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인해 얼마 동안 이스탄불에서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새로 등극한 술탄 마흐무드 2세가 먼 곳에 있는 반항적인 주들을 확실하게 통제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메흐메드 알리는 히자즈 원정에 아들을 사령관으로 하는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스탄불을 달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킬 뿐 아니라 자기가 총독으로서 얼마나 충성스럽고 바람직한 신하인가를 보여 주는 결정이었다. ― 77~78쪽 ― 설령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1821년에 끝났다고 해도, 이 16년간의 통치는 그 이전의 어떤 오스만 총독보다도 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루어 낸 엄청난 변화와 이집트 사회 전체에 끼친 영향, 특히 이집트 전역의 보통 사람들의 삶에까지 미친 통제력은 미증유의 일이라 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기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아라비아에서 거둔 성공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는 약 30년은 더 살 운명이었고, 통치 후반부에는 경제, 행정,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더 많은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룬 중요한 성취들이 빛이 바랠 지경이었다. 통치 후반기에는 파샤가 십 수년에 걸쳐 완성한 행정 조직이 더욱더 확고해졌고 지배권은 그 이전의 어떤 이집트 정부도 감히 침투하지 못했던 지역에까지 뻗쳤다. 이집트 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이 새로운 행정 조직에 의해 점점 더 다면적으로 감시되고 통제되고 조종되었다. 동시에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비롯하여 새로운 기관, 학교, 병원, 공장-모두 이 새로운 행정 조직과 연관되었다-이 이집트 사회의 면면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작용하여 주민과 정부의 관계를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1810년대에 파샤의 영향권은 아라비아 동부 지역까지 팽창되었고, 1820년대에는 남쪽의 수단과 북쪽의 크레타 섬, 남부 그리스의 모레아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비록 메흐메드 알리와 술탄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면 대결의 불길한 조짐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었다. ― 106~107쪽 ― 1830년대는 메흐메드 알리의 경력에 있어서 명백히 하나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오스만 정계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10년간 그가 벌인 군사 활동은 이른바 ‘이집트 문제’라고 알려진 외교상의 위기를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이집트의 국제적 지위가 달라진다. 한편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탄지마트라 알려진 전례 없는 개혁을 시작해야만 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열강의 관계가 변화했으며 유럽 내부의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이집트 문제는 파샤가 오스만의 술탄으로부터 이집트에서 파샤의 지위를 보장한다는 귀중한 피르만을 받아 내야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일이었다. 삼십 대 초반에 이집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것없는 마을 깡패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던 메흐메드 알리가, 육십 대인 1830년대가 되어서는 국제 정치가로 변신한 것 또한 놀라운 자기 재창조였다. ― 130~131쪽 ― 일흔한 살이 되어서야 메흐메드 알리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1841년에 받은 피르만은 그가 1801년 이집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얻고자 노력했던 것을 그에게 주었다. 피르만은 메흐메드 알리가 그의 소중한 땅을 종신토록 다스리고 그 후에는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총독직과 그곳의 증가된 국부를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이는 주요 열강의 지지 속에 오스만 술탄이 확실하게 보장한 것이었다. 피르만을 받으면서 이집트의 종신 총독직을 법적으로 수여받게 된 것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이집트에 온 이래로 상당히 일찍부터 그곳을 이스탄불로부터 독립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 메흐메드 알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정무를 혼자서 처리할 수 없었고, 조금씩이나마 새로운 관료 체계에 권한의 일부를 넘겼다. 비록 그의 감시 아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료 체계는 점점 더 효율적이 되었고 관료들이 생산해 낸 대량의 기록들에서 상당한 정도의 전문성과 자부심을 감지할 수 있다. 관료 체계가 발전하고 전문적인 관료들이 성장하는 데 열쇠가 된 것은 1844년 8월에 통과된 연금법이었다. 이 법령에 따라 파샤나 그의 가족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복무한 기간에 따라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고, 이는 가문에 의한 통치에서 근대 관료제로 바뀌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157~158쪽 ― 메흐메드 알리는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더욱더 심하게 노망이 났고 의사들이 이질 치료를 위해 처방한 질산은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켰다. 가끔 의식이 드는 순간에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고, 그의 생각은 여전히 뭔가 환상 속의 계획에 머물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 가장 괴상한 것은 중국 침공 계획이었다. 1849년 8월 2일 그의 쇠약해진 몸은 마침내 수명을 다했고 알렉산드리아의 궁에서 정오쯤에 사망했다. 관이 나일 강을 통해 카이로로 옮겨졌다. 나일 강을 굽어보는 카스르 알-닐 궁전에서 시작된 장례 행렬은 도시를 가로질러 사이다 자이납 모스크에 도착하여 기도 행사를 치렀다. 카이로 성채로 올라간 시신은 파샤의 이름이 붙은 모스크에 매장되었다. 장례는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 사이드 파샤가 주도했다. 새 총독인 압바스 파샤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그의 가족은 전부 장례에 참석했다. 그러나 상점들은 문을 닫지 않았으니, 일반 대중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삶을 영위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이집트 인 가운데 극소수만이 그들을 거의 반세기에 걸쳐 통치한 사람의 장례 행렬에 참석했다. ― 173~174쪽 ― 파샤는 사실상 자기가 노력한 일들을 꿈에서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루었다. 돈도 없고 군대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유명한 조상도 없고 아랍어도 모르고, 거기에 그를 품어 주고 보호해 줄 만한 이스탄불에 사는 유력한 후원자 하나 없는 미숙한 젊은이가, 19세기 초에 이집트에 와서 오랜 기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이러한 모든 심각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오스만 제국에서 부유한 지방으로 손꼽히는 이집트의 유일하고 정당한 통치자로 남았다. 카발라의 한미한 출신인 그는 이집트에 오자마자 예리한 정치가로 변신하고자 도전했다. 육십 대가 되어 그는 또다시 변신했으니, 국제 정치가의 역할을 하면서 모든 난관을 이겨 내고 당시의 주요 열강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은 새로운 이집트 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죽음 이후 이 왕조는 이집트를 100년간 더 통치했다. 즉 이집트를 차지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직위를 만들어 낸다는 필생의 숙원을 이룬 것으로 메흐메드 알리는 평생의 성취에 만족할 이유가 충분했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이집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메흐메드 알리가 성취한 것들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들은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집트에 올 때부터 이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메흐메드 알리는 자기가 바로 그런 일을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자기 인식에도 불구하고, 아랍어를 쓰는 그의 이집트 인 신민들이 이전에 선조들이 수백만 년은 아니라도 수백 년 동안 겪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생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 중에서 일반 백성에게도 이익이 되었던 것은 그들에게까지 우연히 파급된 무료 의료 서비스뿐으로, 그것만으로 메흐메드 알리의 다른 혁신들이 가져온 참상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흐메드 알리의 중과세, 독점, 강제 노동, 징집 등은 그 실행과 지속에 있어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거의 50년 동안 이집트 인들은 메흐메드 알리의 가혹한 정책들에 자기들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육체적 수고와 집단적 의지로 항거했는데, 그들은 민중 반란, 마을로부터의 도주, 군대와 학교와 공장에서의 탈주, 관료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는 자기 몸을 불구로 만들어 파샤가 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렇다 보니, 드디어 메흐메드 알리가 죽었을 때 그의 이집트 신민들이 장례 행렬에 거의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194~196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