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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드 알리: 오스만 제국의 지방 총독에서 이집트의 통치자로
칼레드 파흐미 | 이은정 |
가격: 16,000원
쪽수: 208
발행년/월/일: 2016.08.12
크기: 신국판
ISBN: 978-89-337-0718-0 03930
감사의 글
옮긴이 해제: 메흐메드 알리의 세계사적 위치

1. 고향 마케도니아
출생
유년기와 소년기
결혼

2. 이집트의 진흙탕
평생의 숙적 ‘휘스레우 파샤’를 처음 만나다
맘루크들을 카이로에서 추방하다
휘스레우를 완전히 돌려보내다

3. 권력 다지기
지역 내 정적들을 제거하다
맘루크 대학살

4. 확고한 굳히기 
대체 권력 기반을 건설하다
경제 정책을 세우다 
히자즈 원정에 나서다
절대 권력
나사 조이기
기반 시설에 투자하다
그래도 남은 불안감
상업적 성공을 거두다
“제 집 안에 있는 늙은 거미”

5. 확대되는 지평
운 좋은 한 해
그리스 전쟁
유럽 열강이 개입하다
휘스레우가 다시 등장하다 
“경사스런 사건”
나바리노의 대재앙
다음을 위한 준비
 
6. 마지막 대결
시혜자 
끈질긴 걱정거리 
시리아 침공에 나서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재구성과 비용 절감
두 번째 시리아 위기
세습 통치를 추구하다
환희
 
7. 승리
파샤와 그의 엘리트: 감시자들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 
메흐메드 알리와 이집트 인들
파샤의 말년
 
8. 파샤의 다면적 유산
무엇이 잘못되었나

참고문헌 
찾아보기

흔히 근대 이집트의 건설자로 불리는 메흐메드 알리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메흐메드 알리는 그곳에서 평범한 삶을 살다가 서른 살에 오스만 제국 군대에 합류하여 이집트로 간다. 이집트에 도착한 지 4년 만에 오스만 제국의 비옥한 속주였던 이집트의 총독이 된 후 50년간 그곳을 통치했고, 자신이 죽은 다음 100년간 이어진 왕조를 창설했다.
통찰력 있고 잘 구성된 이 전기에서 저자 칼레드 파흐미는 메흐메드 알리의 지도자로서의 삶과 오스만 제국과 이슬람 역사에 끼친 막대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에 실시한 전례 없는 경제, 군대, 사회 정책들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교묘하게 왜곡한 그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까지의 영웅화된 이미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이 책의 무대가 되는 이집트는 1517년 맘루크 술탄국이 멸망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복속되었다. ‘맘루크’는 원래 ‘노예’를 뜻하는 말로, 그중에서도 군사적 목적으로 훈련된 노예를 의미한다. 맘루크 술탄국은 아이유브 왕조 말기에 술탄의 노예 병단이 정변을 일으켜 건설한 국가로, 노예병 출신의 군벌들이 과두제적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맘루크 술탄국의 군사 및 정치 구조의 중핵을 이루었던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복속된 뒤 재구성 과정을 거쳐 이집트의 오스만 군사 조직에 편입되었다. 중앙 정부의 군 조직 장악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였던 16세기까지는 상당히 잘 유지되었지만, 17세기 이후 전 제국에 지방 분권화가 진행되면서 이집트처럼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점차로 지역 내 군사 집단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8세기 후반에는 제국 전역에 걸쳐 각 지역에 새로 나타난 군사 실력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분권화 현상이 맘루크들에 의해 나타났다. 중앙에서 온 군 조직들은 점점 더 토착화되어 갔으며, 군사 실력자들은 이집트의 옛 관행대로 노예를 사들여 훈련과 교육을 시켜 자신의 군사 문벌, 즉 맘루크로 이루어진 일종의 가문을 구성하는 행태를 보이게 되었다. 오스만 중앙의 행정적·군사적 장악력이 약화된 가운데 이집트 군사 부문에서 맘루크 현상은 다시 성행한 것이다.
오스만 치하의 이집트는 쌀, 밀, 설탕, 과일 등을 수출하는 풍요로운 곡창 지대이자 무역의 교차로로, 커피와 향료는 이 지역을 경유하는 인기 무역품이었다. 오스만 국고에서 이집트로부터의 세수입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이집트에서의 농업 생산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와 메디나를 부양할 수 있었다. 18세기 내내 이집트의 경제는 활력이 넘쳤다. 이집트의 경제적 자원은 오스만 중앙 정부에나 지역 내 맘루크들에나 매우 중요했다. 17~18세기 군사 파벌들의 격렬한 쟁패도 바로 이러한 이집트의 경제적 자원들을 수취할 때 발생하는 세금 징수상의 이권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졌다. 이집트 각지의 세금 징수권은 대개 맘루크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는 그들의 세력 기반이 되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풍운아
1798년 이 부유하고 자율적인 이집트 지역을 나폴레옹이 정복하고 3년간 프랑스가 지배하게 된다. 비교적 후방이라고 생각되던 이집트가 서구 세력에 의해 점령된 사실은 오스만 중앙 정부에는 개혁의 화급함을, 지방 세력에는 서구 군사력의 우월성과 중앙 정부의 무능함을 각인시켰다. 오스만 치하 그리스 북부의 카발라 출신으로 일자무식의 지방 폭력배 우두머리였던 메흐메드 알리(1769~1849. 메흐메드 알리가 태어난 해는 정확하지 않다. 메흐메드 알리 본인은 1769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으나,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그가 실제 태어난 해는 1770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가 이집트에 와서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조직된 군대에 가담하게 되면서였다. 지략과 용병에 능한 그는 이집트를 장악한 후 그곳을 기반으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 수단, 크레타 섬, 시리아 등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는 한편, 과단성 있는 정책 수행으로 정치적·군사적 성공을 거머쥐면서 오스만 제국 말기의 풍운아가 되었다. 그의 대업은 오스만 중앙과의 갈등 과정에 서구 열강이 개입하면서 이집트와 수단을 차지하는 정도로 제한되었지만, 20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왕조’를 개창한 것 그 자체로 놀라운 성공이었다.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 프로그램은 비서구 사회에서는 거의 최초로 성공을 거둔 근대 개혁이었지만, 효율적이었던 만큼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성공이 어떤 희생을 치르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는지, 그가 어떻게 구시대 특권층의 권리를 박탈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우대했는지 등을 통해 중동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것과 관련하여 메흐메드 알리가 남긴 유산을 되돌아본다.

근대 이집트의 건설자 또는 정복자 
이집트사 분야에서 메흐메드 알리가 어떻게 연구되어 왔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 제8장 ‘파샤의 다면적 유산’에 자세히 나와 있다. 저자 칼레드 파흐미는 메흐메드 알리의 후손이 그의 삶과 정책을 미화하는 데 유용한 사료를 선별적으로 제공했던 점, 이집트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메흐메드 알리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한 인물로 그렸던 점 등이 메흐메드 알리에 대한 인상을 왜곡하는 데 주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메흐메드 알리의 영웅화된 이미지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아랍어, 투르크어, 유럽 언어들로 된 사료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필요했다. 저자는 바로 이렇게 사료에 입각하여 메흐메드 알리 시대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로, 메흐메드 알리를 이집트에 한정하지 않고 오스만 제국의 맥락에서 바라보았다. 이 책의 주인공 이름을 이집트식으로 무함마드 알리라고 하지 않고 터키식으로 메흐메드 알리라고 한 것부터가 그러한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중동 지역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 중요성을 띠는 메흐메드 알리는 그보다 약간 앞선 시대에 자수성가한 군벌 타입의 아얀들과 비슷하다. 아얀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대표하는 풍운아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오스만 제국의 틀이 곳곳에서 와해의 조짐을 보이는 틈을 타 자신들의 한미한 출신에서 여러 단계를 거듭하여 도약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단순히 오스만 제국 내부의 여러 집단과 위계 사이의 역학 관계만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력과의 관계도 잘 경영해야만 하는 시대에 발 빠르게 대처해 정치적으로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메흐메드 알리 역시 그러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인물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메흐메드 알리가 국내외의 도전에 퍼부은 무자비한 폭력에 충격받고 전율하고 분노하면서도, 일종의 ‘악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전통 시대의 끝자락과 근대 개혁기의 초입을 연결하는 인물인 메흐메드 알리의 일생과 행적은 너무나도 낯설고 대담하지만 다른 한편 상당히 동아시아의 개혁기를 연상하게 한다. 국내외의 구체적인 상황이 다르고 서세동점을 경험한 시기도 차이가 나지만,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중앙과 지방의 정치 지도자들이 느꼈던 외압과 개혁의 시급함이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도 반복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메흐메드 알리의 일생은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도 매우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원월드 출판사에서 이슬람권의 주요 인물에 대한 전기를 교양서로 기획한 ‘무슬림 세계를 만든 사람들’이라는 시리즈 가운데 한 권으로, 중동 지역의 역사, 제도, 사료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곳에는 옮긴이가 각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책 속에서

1805년 메흐메드 알리는 서른다섯의 나이로 오스만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주의 합법적인 총독이 되었다. 4년 전 이집트에 아무 연고도 없이 온 그는, 투르크어 방언 하나와 아랍어를 아주 조금 할 줄 알았을 뿐 이집트 사람 대다수가 사용하는 아랍어는 거의 말할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셈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제국의 수도에 출세를 도와줄 후원자도 조금이라도 친분이 있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더욱이 3년간의 프랑스 점령하에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리고 여러 집단(프랑스, 영국, 맘루크, 베두인 족, 예니체리, 알바니아 인 등)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으로 황폐화되어 버린 땅에 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4년 만에 메흐메드 알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그는 프랑스와 영국 군대의 철수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친구이자 동맹자였던 타히르 파샤가 암살되는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또 이 중요한 지역에서 줄줄이 세 명의 오스만 총독들이 이스탄불의 명령을 실행도 못 해보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일이 계속 일어나면서 이방인인 메흐메드 알리는 점점 더 힘 있는 자리로 올라갔다. 메흐메드 알리는 알바니아 인 부대의 헌신, 카이로의 울라마와 상인들의 신뢰, 도시 내 민중들의 충성을 얻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비록 마지못한 것이었지만 이스탄불로부터 이집트에서 제국을 대리하는 적법한 대표자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 61~62쪽 ―

맘루크들을 제거하고 나서 바로 메흐메드 알리는 이스탄불에 긴 서신을 보내, 자기가 한 일이 마치 이집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 하는 술탄의 오랜 소망을 실현한 것인 양 설명했다. 그는 수도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충성심을 의심하고 있고 자신이 점점 더 독자적인 행보를 취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음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과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것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더 이 미묘한 균형 잡기를 해낼 수 있을까? 또 얼마나 오랫동안 이스탄불이 그에게서 주도권을 빼앗지 않고 이러한 운용의 묘를 발휘하도록 놓아 둘 것인가? 1807년 오스만의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셀림 3세를 퇴위시키고 결국은 목숨까지 빼앗아 갔는데, 이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약간의 유예 기간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인해 얼마 동안 이스탄불에서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새로 등극한 술탄 마흐무드 2세가 먼 곳에 있는 반항적인 주들을 확실하게 통제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메흐메드 알리는 히자즈 원정에 아들을 사령관으로 하는 병력을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이스탄불을 달래고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킬 뿐 아니라 자기가 총독으로서 얼마나 충성스럽고 바람직한 신하인가를 보여 주는 결정이었다.           ― 77~78쪽 ―

설령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1821년에 끝났다고 해도, 이 16년간의 통치는 그 이전의 어떤 오스만 총독보다도 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루어 낸 엄청난 변화와 이집트 사회 전체에 끼친 영향, 특히 이집트 전역의 보통 사람들의 삶에까지 미친 통제력은 미증유의 일이라 할 정도로 대단했다. 거기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아라비아에서 거둔 성공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는 약 30년은 더 살 운명이었고, 통치 후반부에는 경제, 행정, 사회 전반에 걸쳐 더욱더 많은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룬 중요한 성취들이 빛이 바랠 지경이었다. 통치 후반기에는 파샤가 십 수년에 걸쳐 완성한 행정 조직이 더욱더 확고해졌고 지배권은 그 이전의 어떤 이집트 정부도 감히 침투하지 못했던 지역에까지 뻗쳤다. 이집트 인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이 새로운 행정 조직에 의해 점점 더 다면적으로 감시되고 통제되고 조종되었다. 동시에 강력한 육군과 해군을 비롯하여 새로운 기관, 학교, 병원, 공장-모두 이 새로운 행정 조직과 연관되었다-이 이집트 사회의 면면을 극단적으로 변화시켰다. 이 모든 것이 작용하여 주민과 정부의 관계를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1810년대에 파샤의 영향권은 아라비아 동부 지역까지 팽창되었고, 1820년대에는 남쪽의 수단과 북쪽의 크레타 섬, 남부 그리스의 모레아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비록 메흐메드 알리와 술탄 사이에 심각한 충돌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면 대결의 불길한 조짐이 점점 더 가시화되고 있었다.           ― 106~107쪽 ―

1830년대는 메흐메드 알리의 경력에 있어서 명백히 하나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이 오스만 정계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 10년간 그가 벌인 군사 활동은 이른바 ‘이집트 문제’라고 알려진 외교상의 위기를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이집트의 국제적 지위가 달라진다. 한편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탄지마트라 알려진 전례 없는 개혁을 시작해야만 했고, 그 결과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열강의 관계가 변화했으며 유럽 내부의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이집트 문제는 파샤가 오스만의 술탄으로부터 이집트에서 파샤의 지위를 보장한다는 귀중한 피르만을 받아 내야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일이었다. 삼십 대 초반에 이집트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잘것없는 마을 깡패에서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던 메흐메드 알리가, 육십 대인 1830년대가 되어서는 국제 정치가로 변신한 것 또한 놀라운 자기 재창조였다.           ― 130~131쪽 ―

일흔한 살이 되어서야 메흐메드 알리는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1841년에 받은 피르만은 그가 1801년 이집트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얻고자 노력했던 것을 그에게 주었다. 피르만은 메흐메드 알리가 그의 소중한 땅을 종신토록 다스리고 그 후에는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총독직과 그곳의 증가된 국부를 계승한다는 내용으로, 이는 주요 열강의 지지 속에 오스만 술탄이 확실하게 보장한 것이었다. 피르만을 받으면서 이집트의 종신 총독직을 법적으로 수여받게 된 것이었지만, 사실상 그는 이집트에 온 이래로 상당히 일찍부터 그곳을 이스탄불로부터 독립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예상한 대로 메흐메드 알리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정무를 혼자서 처리할 수 없었고, 조금씩이나마 새로운 관료 체계에 권한의 일부를 넘겼다. 비록 그의 감시 아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관료 체계는 점점 더 효율적이 되었고 관료들이 생산해 낸 대량의 기록들에서 상당한 정도의 전문성과 자부심을 감지할 수 있다. 관료 체계가 발전하고 전문적인 관료들이 성장하는 데 열쇠가 된 것은 1844년 8월에 통과된 연금법이었다. 이 법령에 따라 파샤나 그의 가족과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복무한 기간에 따라 연금을 지급하게 되었고, 이는 가문에 의한 통치에서 근대 관료제로 바뀌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157~158쪽 ―

메흐메드 알리는 생애 마지막 몇 달 동안 더욱더 심하게 노망이 났고 의사들이 이질 치료를 위해 처방한 질산은은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켰다. 가끔 의식이 드는 순간에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했고, 그의 생각은 여전히 뭔가 환상 속의 계획에 머물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 가장 괴상한 것은 중국 침공 계획이었다. 1849년 8월 2일 그의 쇠약해진 몸은 마침내 수명을 다했고 알렉산드리아의 궁에서 정오쯤에 사망했다. 관이 나일 강을 통해 카이로로 옮겨졌다. 나일 강을 굽어보는 카스르 알-닐 궁전에서 시작된 장례 행렬은 도시를 가로질러 사이다 자이납 모스크에 도착하여 기도 행사를 치렀다. 카이로 성채로 올라간 시신은 파샤의 이름이 붙은 모스크에 매장되었다. 장례는 메흐메드 알리의 아들 사이드 파샤가 주도했다. 새 총독인 압바스 파샤를 제외하고 살아 있는 그의 가족은 전부 장례에 참석했다. 그러나 상점들은 문을 닫지 않았으니, 일반 대중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이 삶을 영위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이집트 인 가운데 극소수만이 그들을 거의 반세기에 걸쳐 통치한 사람의 장례 행렬에 참석했다.           ― 173~174쪽 ―

파샤는 사실상 자기가 노력한 일들을 꿈에서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루었다. 돈도 없고 군대에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유명한 조상도 없고 아랍어도 모르고, 거기에 그를 품어 주고 보호해 줄 만한 이스탄불에 사는 유력한 후원자 하나 없는 미숙한 젊은이가, 19세기 초에 이집트에 와서 오랜 기간 총독으로 재임하면서 이러한 모든 심각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오스만 제국에서 부유한 지방으로 손꼽히는 이집트의 유일하고 정당한 통치자로 남았다. 카발라의 한미한 출신인 그는 이집트에 오자마자 예리한 정치가로 변신하고자 도전했다. 육십 대가 되어 그는 또다시 변신했으니, 국제 정치가의 역할을 하면서 모든 난관을 이겨 내고 당시의 주요 열강에서 정당성을 인정받은 새로운 이집트 왕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죽음 이후 이 왕조는 이집트를 100년간 더 통치했다. 즉 이집트를 차지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직위를 만들어 낸다는 필생의 숙원을 이룬 것으로 메흐메드 알리는 평생의 성취에 만족할 이유가 충분했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이집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메흐메드 알리가 성취한 것들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들은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집트에 올 때부터 이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메흐메드 알리는 자기가 바로 그런 일을 할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자기 인식에도 불구하고, 아랍어를 쓰는 그의 이집트 인 신민들이 이전에 선조들이 수백만 년은 아니라도 수백 년 동안 겪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생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 중에서 일반 백성에게도 이익이 되었던 것은 그들에게까지 우연히 파급된 무료 의료 서비스뿐으로, 그것만으로 메흐메드 알리의 다른 혁신들이 가져온 참상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흐메드 알리의 중과세, 독점, 강제 노동, 징집 등은 그 실행과 지속에 있어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거의 50년 동안 이집트 인들은 메흐메드 알리의 가혹한 정책들에 자기들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육체적 수고와 집단적 의지로 항거했는데, 그들은 민중 반란, 마을로부터의 도주, 군대와 학교와 공장에서의 탈주, 관료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는 자기 몸을 불구로 만들어 파샤가 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그렇다 보니, 드디어 메흐메드 알리가 죽었을 때 그의 이집트 신민들이 장례 행렬에 거의 참석하지 않은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194~19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