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이른바 ‘인아반청(引俄反淸)’ 음모는 아마도 베베르 대리공사가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정부 부처 내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거의 비밀에 부쳐졌을 것이다. 이 음모에 반대한 것은, 척신 중에서는 최근 홍콩에서 귀국한 민영익과 중신 중에서는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 등 2명에 불과했다. 민영익이 반대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으로 볼 때 ‘인아(引俄)’가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의심스러운 반면, ‘반청(反淸)’의 보복은 가공할 만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면 김윤식의 반대는 이 음모가 그의 정의(正義) 관념에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영익의 반대는 어쩔 수 없었지만, 외무당국의 반대는 친러론자들에게 큰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김윤식은 이홍장과 원세개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의 경질은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비밀은 그에게서 누설됐다. 제2차 한러비밀협정은 메이지 19년 8월경에 예비교섭이 대략 성립됐다. 조선 정부에서는 베베르 대리공사에게 조회문을 보내서 조선을 보호하고 타국과 ‘일률평행(一律平行)’하게 하며, 혹시 제3국과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군함을 파견해서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메이지 19년 7월 말에 민영익이 원세개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고, 원세개는 즉시 이홍장에게 보고해서 방지할 수단을 취했다고 한다. ― ‘제20장 갑신변란 후의 정세’ 중에서, 58~59쪽
무쓰 외무대신은 도쿄지방재판소에서 발송한 조선국왕 친서를 한 번 보고는 바로 그 인새가 위조된 것임을 짐작했다. 그는 4월 2일에 오토리 주한특명전권공사에게 전명(電命)해서 친서의 진위를 확인하되, 그 회답은 반드시 공문으로 받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토리 공사는 4월 3일에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를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에게 보내서 외무대신의 전훈에 포함된 이일식 등의 진술을 전달하고, 그 진위, 특히 이른바 국보의 진위를 질문하게 했다. 독판 조병직은 당일로 조회를 보내서 이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아울러 이일식 등 범죄자의 인도를 요청했다.
예전에 아력(我曆) 이태왕 갑오년 정월에 귀국 수도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가 전보로 이일식, 권동수가 집조(執照)를 받지 않고 종적이 수상한 각 정절(情節)을 보고했기에, 본서(本署)에서는 즉시 세 항구의 감리(監理)에게 밀칙(密飭)해서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나판(拿辦)하게 했습니다. 아울러 귀 공사에게 언명하기를,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그들을 체포한 후 본국에 돌려보내 간악한 무리를 징계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 들으니, 이일식과 권동수가 아직도 귀국에서 사단을 일으킨다고 하고, 또 오늘 귀 서기 스기무라 후카시가 와서는 “지금 우리 정부의 전명(電命)을 받으니, 이일식이 옥새가 찍힌 문빙(文憑)을 소지하고 있으므로 본 공사에게 조선 정부에 그 진위를 문의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우선 언명하니, 이후에 조회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본 독판이 살펴보건대, 이일식은 문빙(文憑)을 위조하고 인국(隣國)에 몰래 월경했으니, 그 죄가 망사(罔赦)에 속합니다. 따라서 귀 정부는 응당 전장(典章)에 따라 그를 조사·체포해서 오직 신안(訊案)만 하고 이일식과 권동수 등 여러 범인들을 신속히 본 정부에 압송해서 법률에 따라 처리하게 하는 것이 실로 공정하고 윤당할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내용을 귀 정 부에 전달해서 시행하고 조복(照覆)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청·한국 3국 외교관계에 관한 한, 김옥균 암살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됐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정치적 의의는 매우 중대해서 일한 양국의 내정문제로 발전했다. ― ‘제22장 김옥균 암살 사건’ 중에서, 192~193쪽 통신사의정대차사 정관 히라타 하야토, 도선주 시게타 도이노스케 등은 동래부사 류형이 이러한 의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훈도, 별차에게 접대를 요구했으므로, 훈도와 별차는 당연히 처음부터 난색을 표시했다. 훈도, 별차는 정관, 도선주, 관수 등의 설명을 듣고 난 후, “지난 덴메이 8년 무신년 통신사청퇴 대차사가 도착했을 때, 그것이 규외(規外)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들을 접대하고 통신사 파견의 연기를 수락했다. 그런데 쓰시마에서 또 새로 명목을 지어내서 규외차사(規外差使)를 자주 보내는 것은, 조정의 관대함을 이용해서 접대물품을 탐하는 뜻이 없지 않다.”라고 힐난하고, 다시, “신사가 에도에 가서 전명(傳命)하는 것이 양국 간에 얼마나 중대한 일이며, 또 바꿀 수 없는 예(禮)이거늘, 비용을 절감한다는 핑계로 갑자기 쓰시마에서 전명할 것을 청하는 것은 무슨 도리이며, 무슨 예제(禮制)인가? 사체(事體)를 존중하는 도(道)에 있어 절대로 감히 이처럼 예에서 어긋난 말로 조정을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며 서계 등본의 진달을 거부하고, 또 대차사 원역(員役)의 왜관 퇴거를 요구했다. 정관 등은, ‘역지행빙은 결코 조약을 무시하거나 통신사의 예제(禮制)를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본이 근년에 조잔(凋殘)이 심해서 선례에 따라 영접을 거행할 여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간이(簡易)하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속히 서계와 예물을 봉납(捧納)해 줄 것을 간청했다. 훈도, 별차의 보고를 접한 동래부사 류형은 지난번 선문사(先問使)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신사의정대차사 그 자체가 규외(規外)라서 물리치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명(使命)의 내용으로 봐도 통신사가 국서를 받들고 에도에 들어가서 직접 간바쿠(關白)에게 전달하는 것은 약조에 명기된 바이니, 단순히 경비 절감이나 흉년을 이유로 이를 변혁하는 것은 사체(事體)를 존중하고 약조를 엄수하는 도리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지만, 대차사는 에도 정부의 명으로 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권한으로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이에 예조에 보내는 서계 등본을 진달하면서 동시에 대차사를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을 장계로 아뢰었다. 동래부사의 장계는 12월 21일에 조정에 도착했다. 국왕은 바로 비변사에 내려보내서 품처(稟處)하게 했다. 비변사에서는 덴메이(天明) 8년의 통신사청퇴대차사조차 규외라서 물리쳐야 한다는 의견이었으므로, 이번 통신사의정대차사 같은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도 않았다. 12월 25일에 좌의정 채제공은, “의빙(議聘) 두 글자는 실로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倭)의 교활한 실정이 참으로 몹시 악독합니다.”라는 이유로 동래부사의 장계대로 훈도와 별차를 독려해서 의정대차(議定大差)를 속히 척퇴(斥退)해야 한다고 아뢰고, 국왕의 재가를 얻은 후 비변사 관문(關文)으로 동래부사에게 명령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통신사 역지행빙을 무조건 거부했고, 이로 인해 타이슈 번은 조선과 막부의 중간에서 한때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졌다. ― ‘별편 1 조선 통신사 역지행빙고(易地行聘考)’ 중에서, 580~58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