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일조각의 책들 > 분야별 도서목록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가의 삶과 투쟁
최기영 |
가격: 33,000원
쪽수: 413
발행년/월/일: 2015.12.15
크기: 152*224(양장
ISBN: 978-89-337-0704-3 93910
머리말

제1부 1910~1930년대 북경의 독립운동가
1910년대 변영만의 해외 행적
신채호의 독립운동: 중국에서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이회영의 북경 생활: 1919~1925
1920~1930년대 유기석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제2부 관내에서의 무장투쟁과 독립운동가
이상정의 중국 망명과 한중연대활동
이두산의 재중독립운동과 항일언론활동
이복원의 미국 유학과 재중독립운동
김학무의 무장투쟁과 좌파청년그룹

제3부 중국 유학생과 독립운동
1910~1920년대 항주의 한인 유학생
1930년대 중산대학과 한국독립운동

보론
우빈 주교와 한국독립운동

논문 발표지
참고문헌
중문초록
찾아보기
2016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저자인 최기영 서강대 교수는 중국 관내(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본토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 특히 그 활동에 비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그들의 궤적을 드러내는 데 진력해 왔다. 그중에는 현재 잘 알려진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 많은 지사들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고 활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독립운동사를 연구할수록 후대의 연구자들이 그들을 바로 드러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일반은 물론이고 학계에서조차 묻혀 버린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들이 독립운동사에서 마땅히 차지하여야 할 위치를 찾아 주는 것이 역사학자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도리를 지키고자 10여 년간 분주히 쌓아 온 결과물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신채호나 이회영, 변영만같이 널리 알려진 이들뿐만 아니라 이복원, 이두산, 이상정처럼 그 활동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 유기석과 김학무처럼 연구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개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을 아울러서 살펴보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핍박을 피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한국인들이 많았는데, 저자는 이들의 움직임과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제1부 ‘1910~1930년대 북경의 독립운동가’에서는 변영만, 신채호, 이회영, 유기석을 다루었다. 이들은 대체로 북경을 주 무대로 하여 독립운동을 펼친 이들이다. 활동한 시기도 연령대도 다르고, 이들이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들을 빼놓고 당시의 독립운동을 논의하기는 어렵다.  

제2부 ‘관내에서의 무장투쟁과 독립운동가’에서는 이상정, 이복원, 이두산, 김학무를 논의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양한 경로로 군사교육을 이수하였다. 대한제국 하급 무관 출신인 이복원은 미국 군사학교에서, 이상정은 일본 예비군사학교에서, 이두산은 임시정부 육군무관학교에서, 김학무는 중국군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전사한 김학무를 제외하면,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이들의 무장투쟁은 직접적 무장투쟁보다는 중일전쟁 이후 중국 군사조직에 참여하는 전문가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제3부 ‘중국 유학생과 독립운동’에서는 1910~1920년대 화중 지역 한인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항주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1930년대 중산대학 유학생들이 중일전쟁 이후 무장투쟁에 참여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보론’에서는 중국 천주교 지도자 우빈 주교에 대해 살펴보았다. 1940년 전후부터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우빈은 독립운동의 영수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오랫동안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종교 지도자이다. 특히 임시정부 승인문제와 샌프란시스코회의 참가문제에 있어 협조와 지원을 해준 바 있다.
최기영 崔起榮
서강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문학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근현대사학회장, 한국사상사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일조각, 1991),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일조각, 1997),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일조각, 2003), 『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한울, 2003), 『애국계몽운동 Ⅱ: 문화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이대위: 잊혀진 미주 한인사회의 대들보』(역사공간, 2013)가 있으며, 편저로 『호암 문일평 전집』(민속원, 1995), 『한말 천도교 자료집』(국학자료원, 1997(공편)), 『헤이그특사 100주년 기념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푸른역사, 2009), 『서재필이 꿈꾼 나라: 서재필 국문 자료집』(푸른역사, 2010)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유기석의 아나키즘 수용과 활동은 크게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평등과 호조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책이었다. 그가 회고록 『삼십년방랑기』에서 사랑이나 가족과 같은 개인적 문제는 전혀 논의하지 않고 오직 반일투쟁만을 서술한 것은 망국민의 비애를 되씹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고록을 마무리하며,

나이가 칠순이 되어 오랜 한을 회상하니 한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고, 한 번에 다 쓰기 어려웠다. …… 나 자신의 수십 년간의 고통스러운 회상에 근거하여, 마음속의 말 한마디를 나의 장래의 유언으로 삼고자 한다.
“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중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라고 소회를 밝히었다. 아나키스트로서 조국해방을 위해 30년간 투쟁한 유기석이 유언으로 남기고자 한 주제는 조국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였다. 문화혁명이 전개되던 시기의 언급이어서 아나키스트였던 사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러한 점에서도 그에게 민족적 아나키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145〜146쪽, 「1920〜1930년대 유기석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사실 이상정과 권기옥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무엇보다도 한중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중국군과 관련을 맺었던 것이 한중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 준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의 9개준승 문제 등 한국독립과 관련된 문제를 중국이 적극 지원하지 않자, 그는 자주적 관점에서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한국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중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171쪽, 「이상정의 중국 망명과 한중연대활동」

“어느 모로 보아도 무사의 기풍이라고는 조금도 엿볼 수 없는 그 체격과 언동”이라는 표현대로 군인같이 보이지 않던 온유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한국의 군인으로 살기 위하여 자신을 던진 인물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하여 군사학교를 마쳤으며,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241쪽, 「이복원의 미국 유학과 재중독립운동」

김학무는 1930~1940년대 좌파청년그룹을 이끌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지지하면서 통일당 수립에 반대하고 단체 본위의 연맹 형식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조선의용대나 독립동맹도 그러한 관점에서 참여하였다. 따라서 1943년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의 연결을 위하여 나선 것 역시 그러한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독립동맹에서는 그의 처신을 ‘변절’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용대나 독립동맹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나 해방 이후의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76쪽, 「김학무의 무장투쟁과 좌파청년그룹」

1927년 12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발발한 ‘광주봉기’ 이후 중산대학에 유학한 한국인들이 거의 없다가,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에 다시 그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중산대학에 유학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중일전쟁 발발 전후 한국독립운동의 선봉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산대학이 군사교육기관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 최근 중국학자들이 중산대학 한국 유학생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303쪽, 「1930년대 중산대학과 한국독립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