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영 崔起榮 서강대학교 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문학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근현대사학회장, 한국사상사학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저서로 『대한제국시기 신문연구』(일조각, 1991),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일조각, 1997), 『한국근대계몽사상연구』(일조각, 2003), 『식민지시기 민족지성과 문화운동』(한울, 2003), 『애국계몽운동 Ⅱ: 문화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이대위: 잊혀진 미주 한인사회의 대들보』(역사공간, 2013)가 있으며, 편저로 『호암 문일평 전집』(민속원, 1995), 『한말 천도교 자료집』(국학자료원, 1997(공편)), 『헤이그특사 100주년 기념자료집』(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 백범 김구 비서 선우진 회고록』(푸른역사, 2009), 『서재필이 꿈꾼 나라: 서재필 국문 자료집』(푸른역사, 2010)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유기석의 아나키즘 수용과 활동은 크게는 제국주의를 반대하여 평등과 호조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책이었다. 그가 회고록 『삼십년방랑기』에서 사랑이나 가족과 같은 개인적 문제는 전혀 논의하지 않고 오직 반일투쟁만을 서술한 것은 망국민의 비애를 되씹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고록을 마무리하며,
나이가 칠순이 되어 오랜 한을 회상하니 한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고, 한 번에 다 쓰기 어려웠다. …… 나 자신의 수십 년간의 고통스러운 회상에 근거하여, 마음속의 말 한마디를 나의 장래의 유언으로 삼고자 한다. “망국민이 되고 싶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의 조국과 민중을 열렬히 사랑하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라고 소회를 밝히었다. 아나키스트로서 조국해방을 위해 30년간 투쟁한 유기석이 유언으로 남기고자 한 주제는 조국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과 자유였다. 문화혁명이 전개되던 시기의 언급이어서 아나키스트였던 사실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러한 점에서도 그에게 민족적 아나키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잘못된 평가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145〜146쪽, 「1920〜1930년대 유기석의 독립운동과 아나키즘」
사실 이상정과 권기옥은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무엇보다도 한중연대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중국군과 관련을 맺었던 것이 한중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그의 의지를 보여 준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의 9개준승 문제 등 한국독립과 관련된 문제를 중국이 적극 지원하지 않자, 그는 자주적 관점에서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한국과 중국이 평등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중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171쪽, 「이상정의 중국 망명과 한중연대활동」
“어느 모로 보아도 무사의 기풍이라고는 조금도 엿볼 수 없는 그 체격과 언동”이라는 표현대로 군인같이 보이지 않던 온유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한국의 군인으로 살기 위하여 자신을 던진 인물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미국에 유학하여 군사학교를 마쳤으며, 중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이 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241쪽, 「이복원의 미국 유학과 재중독립운동」
김학무는 1930~1940년대 좌파청년그룹을 이끌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지지하면서 통일당 수립에 반대하고 단체 본위의 연맹 형식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조선의용대나 독립동맹도 그러한 관점에서 참여하였다. 따라서 1943년 임시정부와 독립동맹의 연결을 위하여 나선 것 역시 그러한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독립동맹에서는 그의 처신을 ‘변절’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용대나 독립동맹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나 해방 이후의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276쪽, 「김학무의 무장투쟁과 좌파청년그룹」
1927년 12월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으로 발발한 ‘광주봉기’ 이후 중산대학에 유학한 한국인들이 거의 없다가, 1931년 이른바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에 다시 그 수가 증가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 중산대학에 유학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중일전쟁 발발 전후 한국독립운동의 선봉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산대학이 군사교육기관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 점이 주목된다. 최근 중국학자들이 중산대학 한국 유학생들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러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303쪽, 「1930년대 중산대학과 한국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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