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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랄 리까, 바그다드
유성훈 |
가격: 16,000원
쪽수: 288
발행년/월/일: 2015.04.10
크기: 152*210
ISBN: 978-89-337-0698-5 03810
책머리에

1. 출발
2. 바그다드로 가는 길
3. 천일야화의 도시 바그다드
4. 알리바바
5. 바그다드 하늘길을 열어라!
6. 알 라지 병원
7. 나의 임무 그리고 아랍 문화
8. 빛과 그림자
9. 바빌론
10. 불꽃놀이
11. 그린존
12. 국제구호의 이상과 현실
13. 갈 곳 없는 사람들
14. 전쟁에 관한 담론
15. 일랄 리까, 바그다드!

에필로그
2003년 3월 20일 이라크전쟁이 개전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다. 5월 1일 미국이 종전을 선언한 지 보름 후, 대한적십자사는 창사 이래 최초로 해외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이 책은 당시 바그다드에 파견된 긴급의료지원단의 일원이었던 지은이가 그때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한 에세이다. 서울에서 바그다드로 떠날 때부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지은이가 겪은 전쟁의 참상과 전시(戰時) 이라크 사람들의 애달픈 사연, 긴급의료지원단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더불어 이슬람과 아랍 문화, 이라크를 둘러싼 국제정세, 국제구호단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서술했다.
‘일랄 리까’는 아랍의 인사말로, 환송하는 사람이 “마앗 쌀라마(평안히 가시오.)”라고 작별인사를 하면 상대방은 “일랄 리까(또 봅시다.)”라고 대답한다. 바그다드에 “일랄 리까”라고 인사하고 떠나온 지은이는 언젠가 이라크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 바그다드를 다시 방문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이 책을 썼다.

지은이 소개
유성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도회인이다. 중앙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했다. 2001년 서른 살 늦은 나이에 대한적십자사에 입사해 7년간 국제구호와 공공기관 홍보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불현듯 직장생활이 답답하게 느껴져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세상 구경에 나서 4년간 전 세계 37개국을 주유했다. 여행 도중 틈틈이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에 참여했다. 2011년 연말 건강 악화로 귀국한 후 지금은 새롭게 작가의 꿈을 안고 책읽기와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이라크전쟁 직후, 대한적십자사 최초로 이라크에 긴급의료지원단을 파견하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전 세계의 반전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종전을 선언했다. 그 직후, 대한적십자사는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이라크 전재민 구호 열기에 부응해 이라크에 긴급의료지원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해외에 구호인력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단원 16명과 언론사 특파원 2명으로 구성된 긴급의료지원단은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5월 16일에 이라크 바그다드로 떠났다. 긴급의료지원단은 전쟁의 참상이 가시지 않은 바그다드에서 약 한 달간 의료 봉사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지만, 예정되었던 후속 의료지원단은 바그다드로 떠나지 못했다. 이라크에 있던 모든 국제구호단체들이 철수할 정도로 현지 정세가 크게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긴급의료지원단의 활동은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책은 2003년 대한적십자사 긴급의료지원단의 행정요원으로 참여한 지은이가 그때의 경험을 기록한 에세이다. 서울에서 바그다드로 떠날 때부터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지은이가 겪은 전쟁의 참상과 전시(戰時) 이라크 사람들의 애달픈 사연, 긴급의료지원단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더불어 이슬람과 아랍 문화, 이라크를 둘러싼 국제정세, 국제구호단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서술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바그다드, 그곳에서 만난 이라크인들의 삶
비행기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요르단 암만에 입국한 긴급의료지원단은 차량 4대를 빌려 바그다드로 향했다. 사막을 건너 요르단-이라크 국경을 통과해 바그다드에 이르는 동안 지원단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목격했다. 국경을 넘는 이들을 검문하는 미군 장갑차와 군인들, 난민 캠프, 폭격으로 구멍이 뚫린 교량과 파괴된 이라크군 탱크 잔해의 모습이 무겁게 그들 앞에 펼쳐졌다.
바그다드에 도착한 의료지원단을 맞은 것은 폐가나 다름없는 알 라지 병원이었다. 바그다드에서 손꼽히는 의료기관 중 한 곳이었지만 전쟁으로 직원과 환자가 모두 떠나고 의료시설이 파괴되거나 사라져 병원으로 사용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의료지원단은 청소와 방역을 하고, 수도와 전기 배선을 수리하고, 의약품과 집기를 마련하는 등 일주일 동안 쉴 틈 없이 의료활동을 위한 준비를 해나갔다.
진료가 시작되는 날 50여 명이었던 환자 수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이라크 의사 5명이 보강되고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술 등 심도 있는 진료가 가능해지고 일일 진료 환자 수도 150명까지 늘릴 수 있었다. 환자의 대다수는 오랜 전쟁과 가난으로 영양실조와 빈혈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만성 질환에 피폐해진 여성들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남성, 불발탄에 다리가 절단된 노인과 어린이들도 알 라지 병원을 찾았다. 열악한 의료시설과 한정된 의약품 때문에 제한적인 치료밖에 받을 수 없었지만 이라크인들이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에, 환자들이 번호표를 받아 대기할 정도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의료진은 바그다드를 떠날 때까지 총 2,800여 명을 진료했다.
의료진이 이라크인들을 보살피는 동안, 지은이는 각종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바그다드에서는 시내 한복판에서 수시로 총격전과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고, 화폐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달러화를 몸에 지닌 외국인은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 지은이는 현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몇몇 상점들을 통해 물건을 확보했는데, 상점 주인들은 이라크인 무료 진료에 쓰이는 물품인 것을 알고 어려운 사정에도 물건값을 깎아 주었다.
사담 후세인의 오랜 독재 정치와 전쟁에 시달리던 이라크인들은 미군이 이라크를 점령한 후 또 다른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적, 사회적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는 혼란과 고통이 밀려들었다. 지은이는 이처럼 인간성이 시험대에 오르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함을 지키려는 이라크인들을 만났다.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아흐메드, 쿠르드족이 동등하게 살아가는 새 세상을 꿈꾸는 지나, 선교단체의 무례한 행동에 비분강개하는 오마르 등 함께 일한 이라크 동료들이 그들이다. 깊은 어둠이 지나가면 새벽이 도래하듯이, 지은이는 그들을 보며 언젠가 이라크에도 새벽이 오기를 바랐다.

미군의 두 얼굴과 국제구호단체의 이면을 보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군은 공화국 궁전에 미군정을 설치했다. 의료지원단이 바그다드에서 활동할 때는 이라크 임시정부가 설립되기 전이어서 미군이 이라크를 통치했다. 미군정은 군정청 산하에 국제구호단체를 지원하는 부서(HACC)를 만들어 운영했다. 매일 오전에 회의를 열어 국제구호단체들에 이라크 정황과 안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행정 지원을 했다. 국제적십자 산하 대한적십자사 소속인 긴급의료지원단도 HACC에서 지원을 받았다. 미군은 이 같은 공식 지원뿐만 아니라 물품을 기증받거나 물자 수송에 도움을 주는 등 구호활동을 돕는 데 적극 나섰다.
그러나 지은이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을 뿐이라고 본다. 악의 축을 제거하겠다는 명분 뒤에 석유에 대한 검은 욕심이 숨은 추악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이라크인의 생명과 미래를 앗아갔다. 초반에 승리하는 듯했던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의 국력을 소모시켰고,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자 미국은 이라크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이라크에서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평했지만, 지은이가 목격한 이라크 전쟁은 거리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던 시체들과, 불발탄에 손발이 잘려 병원에 온 사람들의 고통스런 울부짖음이었다.
전쟁 직후 이라크에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구호단체들이 찾아왔다. 국제구호활동을 벌이는 단체는 크게 GO(Government Organization)와 NGO(Non-government Organization)로 나뉜다. UN 산하 단체와 미국의 평화봉사단, 한국의 코이카 등이 GO에 속한다. 엄밀히 말해 적십자는 민간국제기구지만 사실상 GO와 다름없는 성격을 지닌 조직이다. NGO는 정부와 무관하게 설립되고 운영되는 민간단체로 대부분의 국제구호단체가 여기에 속한다. 당시 이라크에서도 각국 NGO들뿐만 아니라 한국 NGO도 13개나 활동했다.
하지만 많은 NGO들이 역사가 짧고 규모가 작아 대규모 구호활동에는 한계를 드러냈다. 상황 파악과 계획 수립 및 준비 단계 없이 바로 긴급구호에 뛰어들다 보니 현지에서 문제가 일어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막에서는 통풍이 잘 되는 천으로 텐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일반 방수포로 만든 텐트를 보급해서 난민들이 한증막 같은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고, 돼지고기로 만든 스팸이 포함된 구호식량 세트를 주어 이라크인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NGO 관계자들의 전문성 부족도 심각한 문제였다.
특히 지은이는 구호활동을 핑계 삼아 선교활동을 하려는 단체와 ‘humanitarian tourist’(인도주의를 표방한 관광객)를 강하게 비판한다. 인도적 지원은 특정한 정치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을 확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러한 단체와 개인들은 선교나 공명심에 눈이 멀어 정작 눈앞에 서 있는 난민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후 12년, 아직도 보이지 않는 평화의 길
지은이가 바그다드에서 돌아온 지 12년이 지났지만 이라크에 평화가 깃들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라크는 내전에 시달려 왔고, IS가 준동하는 중동 지역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
바그다드를 떠나기 전 지은이는 함께 일한 이라크 동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전쟁이 끝나면 바그다드에 다시 와보고 싶다고, 그때는 구호가 아니라 휴가를 즐기러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 이라크 동료가 “일랄 리까.”라고 인사하자고 했다. 우리말의 “또 보자.”나 영어의 “See you again.”과 같은 의미의 인사말이다. “일랄 리까.”라고 인사하고 떠나온 지은이는 언젠가 이라크에 평화가 깃드는 날 다시 찾아가 바그다드에 “앗 쌀람.”(안녕)이라고 말하게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책 속으로
이라크 국경 검문소는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처참히 파괴되어 있었다. 건물은 폭파되어 한쪽 벽 일부만 남았고, 흉물스럽게 홀로 선 벽면에는 수많은 총탄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이라크 국기와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 그려진 부위는 집중난사를 당해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터 옆에는 끌어내려져 부서진 사담의 동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라크에 입국하려고 늘어선 차량 행렬을 25mm 기관포 돌출총좌로 정조준한 미군 M-2 브래들리 장갑차와 실탄을 장전한 소총을 겨누며 차량을 검문하는 미군의 모습에서 나는 내가 전쟁터 한복판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28쪽

전기와 수돗물 공급이 재개되니 깊은 겨울잠을 자던 동물이 봄을 맞아 깨어나듯이 병원 건물도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미리 청소해둔 다섯 개 병실에 각각 필요한 의료기기와 비품들을 정리해 배치하는 등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 알 라지 병원의 병원장이 병원에 들어섰다. 병원장은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며칠 사이 달라진 병원 풍경에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감동한 모습이었다. 병원장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큰 소리로 “Oh! My lovely friends, Koreans.”를 연발하며 차례로 우리를 꼭 껴안아 주었다.   -71쪽

진료 초기에 우리 팀이 어려움을 겪은 또 다른 이유는 진료 예측을 잘못 하고 의약품을 준비해 왔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생각하기에는 전쟁 상황이니 당연히 총상 환자나 수인성 전염병에 걸린 환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거기에 맞는 치료약을 많이 준비해 왔는데, 정작 진료를 시작하고 보니 기후 탓인지 호흡기 질환 환자나 성인병으로 고통받는 고질병 환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양실조와 빈혈 탓에 영양제와 철분보충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거의 모든 환자에게 투약해야만 했다. 서울 본사에 연락해서 의약품을 구하려면 다음 번 전세 화물기가 바그다드에 도착하기까지 약 10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국 미비한 의약품은 대부분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바그다드 현지에서 조달해야만 했다.   -90~91쪽

차가 주차된 곳까지 되돌아 내려오는데 이라크 의사 라이드가 잔뜩 격양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의 땅이다. 이곳은 우리의 땅인데……. 이라크인이 이라크 땅에 들어가는데 외국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다니……. 당신들은 몰라도 나는 그곳에 들어갔어야 했다. 나는 이라크 사람이니까 들어갔어야만 한다. 그랬어야 옳다.”
라이드는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일본에 굴욕을 당한 것처럼 지금 이라크인들도 미국에 같은 방식으로 굴욕을 강요받고 있었다.   -156쪽

그때 차 앞으로 총을 든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의 공격을 피해 도주하던 그 사내는 도망치다 말고 뒤돌아서서 미군을 향해 AK-47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섬광이 번쩍 하는가 싶더니 바로 코앞에서 그 사내의 몸뚱이가 풍선처럼 퍽 터져 버렸다. 25mm 탄환이 뚫고 지나가면서 그의 몸을 산산조각 내버린 것이다. 갑자기 차 앞 유리가 수박화채를 쏟아부은 것처럼 피범벅으로 변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총을 쏘던 사내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골반까지 모조리 날아가 버린 두 다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주인을 잃은 두 다리는 힘없이 길 위에 툭 쓰러졌다.   -198~199쪽

우리 팀이 알 라비 아파트에 머무를 때 그곳에 함께 묵었던 어떤 한국 기독교 단체의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적십자 표장에 들어 있는 십자가를 보고 적십자도 기독교 단체라고 오인했는지, 나에게 자신이 소속된 단체의 활동 목표와 향후 선교 계획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그는 구호활동과 병행하여 앞으로 바그다드에 교회 다섯 곳을 건립할 계획이라며 이라크 전쟁은 천우신조이니 이번 기회에 이슬람을 박멸하고 아랍에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의 말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남의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을 두고 천우신조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6·25 전쟁이 터지자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는 패전으로 몰락한 일본 경제가 기사회생하게 됐다며 손뼉을 치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천우신조였다. 그리고 박멸이라는 단어는 악성 병원균이나 해충에나 갖다 붙이는 단어가 아니던가. 내 신앙이 소중하면 그만큼 남의 신앙도 존중해 주어야 하는 법이다. 구호활동을 한다는 자가 구호 대상자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니 나는 무슬림을 바라보는 그의 모순된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22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