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황룡사의 장륙존상과 신라의 아육왕상계 불상 특히 사천성 성도 출토의 재명在銘 아육왕상 모상은 지금은 자연석의 대좌만 남아 있는 황룡사의 장륙존상의 모습을 추정하여 보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다. 현존하는 신라의 불상 중에서 이 성도의 상을 토대로 하여 본 아육왕상식 불상형식을 따른 예는 대체로 7세기 후반기의 조상에서부터 발견되는데 그중 전 금광사지 출토 석조여래입상이나 황복사지탑 내 발견 순금여래입상들은 그 형식이 정형화하기 이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수인이라든지 의문의 표현, 조각수법 등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새로운 형식이 황룡사의 아육왕상을 계기로 일차적으로 전래되었더라도 다시 새로운 모본이 7세기 중엽이나 혹은 그 전후해서 들어옴으로써 그 전통이 계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상의 전래 경위 역시 중국에 있는 아육왕상의 모상이나 도상이 전하여졌을 경우도 있고 혹은 신라승의 인도나 서역과의 직접적인 접촉에서도 가능했었으리라고 본다. 특히 신라의 승려들은 이미 당의 구법승 의정義淨 이전에 육로나 해로를 거쳐 날란다Nalanda를 방문하였던 분들도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전혀 불가능한 추측도 아닌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의 불상 중에는 가끔 중국의 상 중에서는 안 보이는 인도 조상적인 요소가 잔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신라의 불교미술의 수용에는 당뿐만 아니라 서역, 동남아 및 인도를 무대로 매우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신라불상형식의 발달도 반드시 중국의 조상의 발달과 일치하지 않고 몇 가지의 특정한 형식이 특히 유행하는 것을 보면 신라인이 이미 유입된 형식에 집착하는 보수적 경향의 일면으로도 해석할 수도 있고 또한 불교교리의 수용과정과 신라적인 특수성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논의한 아육왕상 계통의 불상형식은 또 다른 인도계의 잘 알려진 불상형식인 우전왕상식優塡王像式 불상-신라의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과 같은 형식의 불상-과 더불어 통일신라 불입상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 상들은 차차로 많은 변형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예를 들어서 상의 대의가 목에서 길게 늘어뜨려지면서 가슴의 일부를 노출시킨다든지 혹은 내의를 보이게 한다든지 또는 가슴띠를 맨다든지 여러 가지 변형을 가하여 신라화하여 간다. 불안도 넓적해지고 광대뼈가 나오며 한국적인 얼굴인상을 보여주는 듯 서서히 신라불상의 토착화가 이루어지면서 신라 고유의 양식을 확립시켜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 ‘제2편 삼국시대의 불교조각’ 중에서, 108~110쪽
경주 굴불사지의 사면석불에 대하여 이제 실제로 굴불사의 사면불상을 관찰하여 보건대, 서면西面에는 삼존불三尊佛이 있는데 주불主佛의 왼쪽 협시脇侍의 보관에 아미타입상의 화불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도 3-72, 72 b). 이로써 이 협시가 관음이고 반대편의 협시가 세지勢至, 주불은 아미타인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면東面에는 결가부좌하고 있는 여래가 있는데 오른팔은 일부 파손되었으나 시무외인의 위치로 올려졌고 왼손은 다리 가운데에 놓여져 있으며 약합藥盒을 들고 있다(도 3-73). 즉, 약사불로서 동방 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의 교주敎主인 것이다. 동방에 약사불이 오는 경전으로는 상기한『 공작왕주경』으로 사방불 중 사방과 동방불의 명칭과 일치하나 남·북면의 상을 신앙의 대상에서 흔히 나타나지 않는 정방불 칠보당불로 추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이 있다. 특히 북면에는 여래상은 보이지 않고 부조보살상이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선각보살상은 11면 6비의 관음상으로 밝혀졌으니(도 3-74, 74 a, 74 b), 결국 이 사면불이『 공작왕주경』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이 굴불사 사면불은 어느 한 경전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당시의 현교사상顯敎思想에서 가장 깊고 널리 신앙되었던 부처를 사방불로 표현하였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며 북면의 부조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성불하여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하기로 기약이 되어 있는 미륵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의미로 남면에 있는 불상은 본래 삼존불이었으나 우협시右脇侍는 완전히 떼어가서 흔적만 남아 있고 주불은 얼굴이 없는 입상이며 좌협시左脇侍 역시 그 명칭을 알아낼 특징이 없으나 석가로 간주하는 것이 통례이다(도 3-75, 75 a, 75 b). - ‘제3편 통일신라시대의 불교조각’ 중에서, 283~284쪽 통일신라시대의 항마촉지인불좌상 대체로 한국에서의 항마촉지인의 불좌상은 7세기 후반에 수용되어 8세기에서 9세기 동안에 유행하며, 그 발달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가지 변형은 대략 16종류의 형식으로 분류하여볼 수 있고 이 분류의 기준은 우선 불의가 우견편단인가 통견인가로 시작하여 무릎 사이의 주름의 형태, 엄액의와 가슴띠의 유무, 또는 약합 표현의 도상적인 요소까지를 포함하였다. 첫 번째 분류기준에서 나눈 바로는 통견의 불상형으로는 가장 초기의 예인 군위석굴의 본존상에서는 삼국시대 조각의 보수적인 성격과 새로운 도상의 결합에서 나타나는 신·구 요소의 공존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산의 칠불암의 본존상에서는 7세기 후반에 중국에 새로이 전래되어 유행되기 시작하는 우견편단 촉지인불좌상의 원형, 즉 인도의 굽타시기의 촉지인좌상형을 충실히 따른 통일신라 초기의 예로서 등장하고 다시 석굴암의 본존상과 같이 완성된 경지에 다다른 불상이 이룩되는 것을 알았다. 이 석굴암 본존상과 같이 우견편단형의 불의나 옷주름의 처리 방법을 따르는 정통 계열의 예가 특히 많은 것은 이 석굴암 불상이 신라의 불교미술계에 끼친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두 무릎 사이의 부채꼴형 옷주름은 우견편단은 물론 통견의 좌상에서도 공통으로 표현되며 촉지인상뿐 아니라 신라 말기의 비로자나불상에서도 발견되고 고려시대의 불상에까지도 잔존하여 이어지는 것을 알았다. 촉지인불좌상형의 이와 같은 신라적인 발전의 배경에는 7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활발히 이루어지는 인도와 당, 신라와 당과의 빈번한 교류, 그리고 신라와 인도와의 직접 또는 간접적인 접촉에서 오는 불교문화의 국제적인 영향이 반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새로이 신라에 수용되는 여러 요소들은 이미 신라 조각에 나타나고 있던 전통 위에 신라인 고유의 종교관과 미의식이 결합되어 더욱 발전된 결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촉지인불상들은 석굴암상에서 보이던 완벽에 가까운 조각기술과 균형 잡힌 몸매, 그리고 간결한 조형감에서 느껴지던 신비한 내면세계의 표출이라는 종교조각으로서의 우수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 제작연대도 석굴암 이후의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혹은 10세기로 분포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상 중에는 연대를 동반하는 상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다. - ‘제4편 항마촉지인불좌상 연구’ 중에서, 438~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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