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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봄을 삼키다 (하강 박제경 문장선집)
박제경 | 이남종, 이영주, 김종준, 서경호 |
가격: 30,000원
쪽수: 324
발행년/월/일: 2014.11.15
크기: 신국판 변형
ISBN: 978-89-337-0686-2 (03810)

* 가의대부 궁내부특진관 하강 박공 행장(嘉義大夫宮內府特進官荷江朴公行狀)
* 박제경 한적시선을 읽으며
* 하강 박제경의 생애
· 제1부 | 봄날은 간다(暮春途中)
· 제2부 | 산은 자유로워 나 또한 그러하다(山自閑時我亦閑)
· 제3부 | 빌어먹을 가을비(秋雨歎)
· 제4부 | 이 눈물 다 마르면 어찌하리(其如淚盡何)
* 상소문(上疏文)
* 하강 박제경 연보
하강 박제경(荷江 朴齊璟, 1831~1911)은 구한말 궁중의 문장을 담당했던 문인 관료였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한 박제경은 고종의 측근으로 고종이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곁을 지켰으나, 세자를 가르치고 궁중의 예식 관련 공식 문장을 짓는 등 권력의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한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평가받는다. 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관리 이력과 함께 왕실 문자의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고 기록된 데서 확인할 수 있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하강문고』 6권의 필사본이 남아 있기도 하다. 지난 2006년 이남종 교수가 그중 1권과 2권의 시문을 완역해 세상에 내놓았고 이로써 하강 시문의 본격적인 조명이 시작되었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놀랍도록 진솔하며 담백하다. 따라서 하강의 시문 중 한적시閑寂詩를 중심으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100여 편을 따로 골라 우리글로 새롭게 번역해 세상에 내놓는 것은, 우리 한시 전통의 한 성취를 발굴하고 확인하는 중요한 작업이라 하겠다. 더불어 박제경이 남긴 상소문 중 15편을 선별해 번역함으로써 조선 말기 궁중과 사대부의 정신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이 책의 작업엔 이남종, 이영주, 김종준, 서경호 등 모두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해 만만치 않은 공을 들인바, 시에 관심이 있는 교양 독자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자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하강 박제경이 걸어온 길
박제경이 살던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의 정절기로, 조선도 이 흐름에 쓸려 외세의 압력과 내부의 개혁 운동 등으로 인해 나라 안팎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박제경은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다하며 왕조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박제경이 관직에 오른 것은 40세 때인 1870년이다. 그때까지 그는 부인인 진주류씨(晉州柳氏) 사이에 훈양(薰陽), 시양(蓍陽), 순양(荀陽), 신양(莘陽) 네 아들을 두었을 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제경은 1870년 세자시강원에서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정5품 문학(文學)으로 등용된다. 박제경은 평생 크게 두 가지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는 보수적 태도에서 개화를 수용한 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왕실에 충성을 다하며 고종과 끝까지 함께했다는 점이다.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 1896년 아관파천 때까지 고종은 사실상 권력을 상실하였고 왕실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했는데, 이 기간 박제경의 연보도 공백 상태이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들어가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시점에 박제경은 다시 등장한다. 구본신참을 표방하며 대한제국이 출범했을 때 박제경이 참여했던 것도 ‘보수적인 개혁’과 ‘고종에 대한 의리’라는 두 가지 측면 때문이었다.
박제경이 왕실의 문장을 본격적으로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부터이다. 이미 박제경은 1857년에 순조비이며 안동김씨로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진향문(進香文)을 지은 바 있지만, 1870년부터는 왕의 교서(敎書)를 담당하게 된다. 1870년에는 친경반교문(親耕頒敎文)을 지었고, 1874년에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탄생을 축하하는 원자탄강반교문(元子誕降頒敎文)을 저술했다.
1878년에는 익종비이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칠순을 기념하는 반교문과 철종비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별세를 애도하는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다음 해에는 철인왕후 진향문을 지어 올렸으며, 나중에 신정왕후가 별세(1890)하자 역시 진향문을 올렸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돌아왔을 때 지은 반교문도 <하강문고> 3권에 실려 있다. 이같이 왕실 행사가 있을 때 박제경은 빠지지 않고 글을 짓고 있는데, 이는 대한제국 때도 마찬가지였다.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33세의 나이로 죽고, 1906년 윤택영(尹澤榮)의 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새 황태자비로 책봉되었을 때도 황태자비책봉교문(皇太子妃冊封敎文)을 지었다.
1880년대 후반 활동에서는 1886년 중학교수(中學敎授), 1887년 남학교수(南學敎授) 겸 경학원교수(京學院敎授)를 맡은 점이 주목된다. 중학과 남학은 당시 관립중등교육기관인 사학(四學) 중 하나였다. 또한 경학원은 유학 교육의 진흥을 위해 성균관 내에 설치된 기구이다. 같은 시기 박제경은 각종 과거시험에서 독권관(讀券官)으로 활동했다. 독권관은 국왕이 친임한 시험의 감독관인데, 글을 채점하며 응시자의 우수한 답안지를 국왕 앞에서 읽는 일을 하였다. <하강문고> 6권에 나오는 상소문 중 과거제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가 눈에 띄는데 바로 이때 작성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문집의 다른 글들은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면이 많은 데 반해 과거제 폐단 상소는 비교적 강고한 문투로 현실 상황을 비판하고 있다. 즉, 시험 답안지의 중복 제출 등 온갖 비리가 횡행하는 과거시험의 무용론을 제기하면서, 이 폐해를 바로잡지 못하면 인재가 나오지 못하고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게 된다고 한탄하고 있다. 60세인 1890년에는 신정왕후 국장도감의 도청(都廳)이 되었고, 그 상급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당상관이 된 것이다. 이후 성균관사성,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호조참의(戶曺參議) 등의 관직을 지냈고, 독권관도 계속 맡았다.
박제경은 대한제국 성립에 적극 동참하였는데, 그는 고종의 명을 받아 황제즉위표(皇帝卽位表)를 작성한다. 당시 칭제 과정에서 일부 보수 유생들은 참람되다며 반대했다. 이에 고종은 친왕 세력을 중심으로 개화 정책을 계속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협회 등 급진 개화 세력은 물리치고 나라의 바탕으로 유학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계속 천명하였다. 박제경은 바로 그러한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해 대변해줄 수 있는 측근 학자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제경은 고위 대신으로 올라가는 것은 스스로 사양한다. <하강문고> 6권의 사직 상소문 중에는 충청도,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관찰사 직 등을 사양하는 글들이 보인다.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제경은 1902년경 궁내부특진관과 장예원소경 등의 궁중 내부 고위직을 맡았으나 1904년 1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다. 이때는 러일전쟁 발발 직전으로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고종의 통치력이 약화되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08년 3월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의 지시로 죄명을 벗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무슨 죄명인지는 불명확하다.
박제경의 생애는 이처럼 고종의 부침과 결을 함께하였으며, 조선 왕조가 망국에 이른 직후인 1911년 12월 10일 생을 마감했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가 남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한시의 세계
무엇보다 하강의 한적시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의 기원을 살펴보자면, 학문의 깊이, 언어를 조탁하는 솜씨, 틈만 나면 붓을 드는 성실함 등 여러 갈래의 다양한 원천과 더불어 박제경이 처한 정치적 환경도 한몫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박제경은 쇠락한 조선이 겪는 혼란 속에서도 고종의 곁을 지킨 충신이었다. 그럼에도 임금의 덕(德)과 선비의 충(忠)을 바탕으로 조선이 다시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리라는 그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거대한 시대의 흐름은 한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큰 격랑이었다. 박제경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받은 좌절감을 시로 승화하는데, 그 출발점은 바로 ‘자연과 마주하는 자아’였다.
여기서 자연은 세상의 먼지가 소멸한 곳이며, 바로 그러한 시공간은 한적시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한적시는 역설의 미학이라 할 만한데, 이는 유가(儒家)의 공업(功業)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치며 유학사상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된다. 우리도 고려 때부터 유가의 광범위한 영향 아래 놓이기 시작해 조선 시대엔 나라의 바탕을 이루는 사상으로 굳건히 뿌리를 내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유가의 지향점은 태평성대(太平聖代)에 있으며, 선비란 자고로 ‘있을 것이 제자리에 있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사회’를 향해 끝없이 수신(修身)하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늘 현실과 길항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현실 정치에서 뜻을 펼치지 못한 선비들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당연히 이들의 수신(修身) 방법은 ‘읽기와 쓰기’였고 그 핵심엔 늘 시(詩)가 자리했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천착한 대상은 먼지와도 같은 세상에서 모든 것이 조화로운 자연으로 옮아갔으며, 사회적 자아가 아닌 서정적 자아가 시를 이끌었다. 심상으로 마주한 세계가 이들의 붓끝에서 아름다운 시로 재창조된 것이다. 즉, 시문(詩文)이 공업(功業)의 한 방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문학은 결핍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적시야말로 유구한 한시의 전통에서도 가장 문학성이 높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 백거이(白居易), 소식(蘇軾)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자유롭고 한가로운 정취를 읊었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지만 차이점도 있다. 도연명은 자연 그대로를 담담하고 소박하게 노래했고, 백거이는 통속적인 언어를 이용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시풍을 만들어냈으며 ‘물욕 없음의 세계’를 그 누구보다 잘 형상화했다. 소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미적인 자아를 적극 개진하며 물아일체의 세계를 꿈꾸었는바, 소식만의 개성이 도드라진 주옥같은 명시를 남기게 된다.
하강의 한적시 또한 이러한 시인들의 영향 아래에 있다. 차이가 있다면 하강이 포착한 서정의 대상이 우리의 산하, 우리의 꽃과 나무라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 말기의 어지러운 현실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나라를 걱정하는 한 선비의 무기력함이 죄 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연과 더불어 시로 승화된다.

해마다 변해가네 세상이여 人世年年非舊事
산이 있으니 산으로 돌아올 일 有山何事不歸山
벼슬 내려놓고 그저 통나무 아래 눕는다 休官臥穩衡門下
산은 자유로워 나 또한 그러하다 山自閑時我亦閑

하강의 시 <還山: 산에 들다>의 전문이다. 말 그대로 지식인의 절망 속에 숨겨진 시적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박제경의 연보에 따르면 그의 정치적인 여정은 고종의 부침과 궤적을 같이함을 알 수 있다. 구한말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그리고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며 끝내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의 왕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박제경의 생애를 추측건대 그는 궁중의 문장을 담당하고 세자를 가르쳤던 학자로 고종 곁에서 정치적인 색깔을 띠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고종을 보필하던 충직한 신하에 가까웠던 듯싶다. 따라서 그의 벼슬살이도 순탄치만은 않았으며 지방에 내려가 지내는 때도 잦았던 듯하다. 이러한 현실 상황은 오히려 하강 한적시의 밑거름이 되는데, 그의 대표적인 한적시에 산과 호수가 주로 등장하고, 충남 당진과 보령 등지의 영보정(永保亭), 능허각(凌虛閣)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몇 해인가, 남쪽으로 돌아온 지 問我南歸今幾霜
섬돌 옆 노란 국화, 피었다 지길 열 번 坐看階菊十番黃
머리맡 귀뚜라미 가을을 재촉하고 床頭蟋蟀催寒候
해 질 녘 울타리 끝엔 추위에 떠는 잠자리 籬末蜻蜓立晩凉
혼자라지만, 시를 노래하니 견딜 만하고 客去孤吟耐荒寂
늙은이의 살림살이 풍년 덕 좀 보려는가 老來生計幸豊穰
밖에 나가 고기잡이 노인에게 부탁하리 出門更向漁翁說
달밤 서쪽 호수에 배 한 척 띄우자고 管領西湖月一航

이 시의 제목은 <還山作: 다시 산으로>로 여기에서 산은 속세가 아닌 이상향을 상징하는 어떤 곳이며, 국화가 열 번이나 피었다 지는 동안,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시인은 아주 오랫동안 그 속에 묻혀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하강의 한적시를 읽다 보면 현실 정치가 어려워질수록 자연과의 대면은 미학적으로 더욱 첨예해짐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 시에서처럼 찾아오는 이도 없이 귀뚜라미 울고 잠자리도 추위에 떠는 쓸쓸한 가을날, 그 정적에 몸을 맡기고 ‘서쪽 호수에 배 한 척 띄우자’는 시인의 역설에서 우리는 먹먹한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나이 들수록 시간만 덧없다 老去匆匆時物遷
시 짓고 해를 넘기고 또 시를 짓는다 聊將詩句送流年
지팡이는 뒤뜰에서 젖고 笻頭濕盡園中雨
산 아래 안개는 나막신에 묻어 온다 屐齒澹穿山下烟
새 우는 나뭇가지엔 골짜기의 봄, 아직 남아 있고 谷口春殘黃鳥樹
흰 갈매기 날자 호수의 물은 하늘에 가 닿는다 湖眉水接白鷗天
일없이 한가로운 늙은 이 몸 此翁閑適渾無事
골짜기 솔바람에 기대 낮잠을 청한다 一壑松風足晝眠

하강의 한적시 중에서도 시적 묘사가 특히 아름다운 <夏日雨中登後麓: 산기슭의 여름비>는 유유자적하고 호탕하기까지 한 시인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지팡이는 뒤뜰에 내리는 비에 젖고, 산 아래 안개는 산책하는 나막신에 묻어 온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공간인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시인은 공간의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나뭇가지에 남아 있는 봄을 찾아내 시간을 거스르는 의식의 흐름마저 보여준다. 또한, 갈매기의 날갯짓으로 호수의 물이 하늘에 가 닿는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의 극치이다.
세상이 주는 절망이 클수록 내면의 심상은 더욱 근원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문학의 한 본질인바, 박제경의 한적시 또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1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의 독자들도 그 아름다움을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한적시 100여 편을 골라 현대어로 번역해 따로 읽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한시를 어렵게 여기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한시 감상의 즐거움을 소개함과 더불어 조선 말기 한 지식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우리 삶의 조건을 반추하는 기회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강은 지칠 줄 모르는 창작열로 수많은 시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고 한자 문화권의 시 전통을 계승해 자신만의 시 세계를 승화시킨 주옥같은 작품들은 분명 주목받아 마땅하다.

책 속으로

暮春途中       봄날은 간다
馬頭城郭卽蠶峰 배를 대고 성곽에 올라 잠봉을 바라본다
今夜初聞長樂鐘 밤이 되니 처음으로 장락궁의 종소리를 듣는다
楊柳水邊舟小小 강을 따라 수양버들, 그 옆의 작은 배들
杏花村畔屋重重 살구꽃 핀 마을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長生不藉神仙術 신선주 기울인들 얼마나 더 오래 살까마는
造物能令我輩容 인생사 다 하늘의 뜻이어서
携取殘書歸市隱 못다 읽은 책 싸들고 조용히 지내며
一生心事任疎慵 흐르는 시간에 느릿느릿 생을 맡기리라

湖上春日       봄날의 물가
深院回塘繞蝶衣 뒷마당 연못가 둑에 고운 꽃 핀다
辛夷花盡又薔薇 목련 지고 장미가 핀다
風柔燕子說心坐 산들바람 분다, 앉은 제비 재잘대고
日暖鶯兒含態飛 따뜻한 햇살 아래 꾀꼬리 멋지게 난다
紫陌光陰旅魂斷 화려한 도성 생활에 나그네 마음 애달팠으나
白湖烟景老年歸 늙어서야 하얀 운무 내리는 호숫가로 돌아왔다
傍人喚起春眠困 누군가 노곤한 봄잠 깨우니
且倚幽欄看夕霏 또 이렇게 난간에 기대, 고요한 저녁 안개 바라본다

暮春野步晩歸   봄 저무는 들판에서
西湖勝日出東林 날 좋은 날, 호숫가 숲으로 들어가니
燕語鶯啼春正深 제비 울고 꾀꼬리 지저귄다, 봄 깊어간다
楊柳影牽遊子夢 나그네 꿈속으로 수양버들 그림자 드리우고
桃花氣醉韻人心 복사꽃 향기에 넋이 나간 시인이 하나,
山要細翫頻停屐 걸음을 멈춘다, 산을 본다
水欲閑聽獨抱琴 마음으로 거문고 튕기며, 물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薄暮歸來新月白 날 저물어 돌아오니 환한 달빛
無眠且就此宵吟 잠 못 드는 이 밤, 또 시를 노래한다

秋夜詠懷       가을밤에
匏花籬落稻花田 울타리엔 박꽃 피고 논에는 벼꽃이 펴
畵得農家七月篇 빈풍칠월도 한 폭 그려본다
草露蟲聲知夏後 풀에 이슬 맺히고 벌레 우니, 여름이여 안녕
林風蟬語報秋先 숲에 바람 불고 매미 우니, 가을이란다
三盃白酒騰騰醉 백주 석 잔에 거나하게 취하고
一枕黃粱栩栩眠 한바탕 꿈에 해죽해죽 웃으며 자다가
頹臥此身人喚起 벌렁 누운 몸 벌떡 일으키니
夕陽已在小樓前 마당엔 저녁노을이 깜짝!
 
湖上晩歸偶吟   해 질 녘 물가에서
白首歸來物外遊 머리 하얘 돌아와 그럭저럭 지내니
湖山勝處是吾州 산 좋고 물 좋은 곳 고향이 따로 없다
爲官未有營三窟 벼슬살이 바람 잘 날 없었지만
終老那無卜一邱 늙어 기댈 언덕일랑 걱정 말자
紫李黃瓜村路僻 인적 드문 길가에 자두 오이 익어가고
碧梧翠竹洞門幽 오동나무 대나무 이리저리 자라는 마을
掛冠無復彈冠志 갓 벗어 걸어놓고 나랏일도 내려놓고
長掩踈簾臥小樓 길게 발 드리운 다락방에 조용히 눕는다

合邦日感舊 국치일에
憶昔重修日 멀리 조선을 세우던 날
漢陽文物開 서울에 새 문화가 열렸다
三韓如掌運 삼한을 손바닥 부리는 듯했고
百粤稽顙來 백월은 머리를 조아렸다
麥秀殷墟已 은나라 옛 언덕엔 보리가 피고
黍離周室頹 주나라 옛 집터엔 기장이 자란다
秋風西向哭 가을바람 서쪽을 향해 통곡하니
萬事摠成灰 모든 것이 재가 되었구나

大臣辭職疏 대신을 사양하는 상소
伏以臣, 以世祿之裔, 嘗叨具瞻之地則心懸, 宸極, 宜倍他人, 然猶跧伏畎畝, 長逞不返者, 非獨以臣之自知其不足於補相, 亦惟殿下之聍俯燭而垂許故, 數年以來, 實感聖恩, 自以謂投閒置散, 以畢餘生矣. 千萬夢外, 寵命, 復下, 加臣以首揆之命, 此誠何哉. 豈以臣之退伏, 誠不見孚而然歟, 抑亦上之寵榮老臣, 垂此罔極之恩耶. 百僚非人, 猶患僨事, 重大之任, 固非虛名可羈則臣非其人, 不惟自分, 殿下之聍愼簡, 爲何如而謬恩, 至此, 百甭思量, 實不知聖意之聍任, 惶懍窮蹙, 十倍前日, 又況近日事務, 尤非蒙騃者, 聍可擔夯而臣本庸陋, 固難陣力就列踐齒聍加, 病與爲仇, 只待符行, 不省其他. 此實臣之眞情而不敢餙辭者也. 設或冒進而無補國事則如臣貪祿之譏, 願不足恤. 國軆之爭損, 莫此爲甚, 故, 歷陳必辭之義, 伏乞聖明, 察臣無他, 亟命鐫削臣新授職秩, 改卜賢德, 一以慰衆望, 一以安私分, 不勝幸甚, 臣無任惶愧祈懇之至.
엎드려 생각하옵니다. 신은 대대로 나라의 녹봉을 받아온 후손입니다. 일찍이 외람되게 뭇사람이 모두 우러러보는 자리에 올랐으므로 마음이 대궐에 내걸림이 의당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밭의 고랑과 이랑에 묻혀 오랫동안 굳세게 돌아오지 않은 것은, 비단 신이 스스로 대신에 부족함을 알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오직 전하가 내려보시고 살펴 허락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수년 이래 실로 성은을 입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가한 곳으로 가 여생을 마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천만 꿈에도 생각하지 않던 터에 전하가 총애하여 내리는 명이 다시 내려졌습니다. 신을 영의정으로 하라는 명을 내리신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신이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 참으로 믿음을 얻지 못해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역시 늙은 신하를 총애하는 전하의 망극한 은혜가 베풀어진 것입니까? 백관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일이 실패할까 근심하게 됩니다. 중대한 자리는 참으로 허명(虛名)으로 매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신이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전하의 신중히 선택하는 바는 어떠하길래 잘못된 은혜가 여기에 이르렀는지 백 번 생각해도 실로 성의(聖意)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두렵고 근심함이 전날보다 열 배입니다. 또 하물며 근일 사무는 아둔한 자가 담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비루하여 진실로 힘을 다해 대열에 서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더해지면 병이 원수가 되어 그저 같이 가기를 기다리지, 다른 것을 살피지 못합니다. 이는 실로 신의 진정이며, 감히 꾸며내는 말이 아닙니다. 설혹 무릅쓰고 나아간다 해도 나랏일에 보탬이 되지 못한즉 신이 녹을 탐했다는 비웃음을 사고 말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저의 부족함을 불쌍히 여기시면 국체의 손해가 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로 계속해 사직하겠다는 뜻을 간곡히 진술하였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성명(聖明)이시여! 신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살펴 속히 신에게 새로 내려진 직임과 녹봉을 없애도록 명하십시오. 그리고 어질고 덕 있는 자로 바꾸어 한편으로 공의를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자의 분수를 지킨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특별히 다른 임무 없이 황송하고 부끄러워 간절히 기도함이 지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