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북으로 반주하며 설창하는 공연은 선진시대부터 명대까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송대 이후 주요 강창들은 거의 모두 북 반주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북이 강창의 반주에 매우 중요한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연들을 기반으로 명 말, 청 초에 ‘고사’라는 기예가 정식으로 등장하여 북 반주 강창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42쪽 전기 고사계강창의 소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논어』나 『맹자』 등의 고전에 나오는 단락에서 소재를 취하거나, 공자나 맹자와 관련된 일화에서 소재를 취하여 부연한 것이다. 「제인장」, 「동곽외전」, 「태사지적제전장」, 「제경공대공자오장」, 「공부자고아사」, 「자화사어제」, 「누항단」이 이러한 작품들이다. 다른 하나는 고전이 아니라 여러 역사적 사건이나 당시 생활상, 그 밖의 여러 요소에서 소재를 가져온 종류이다. -110쪽 농촌에서 형성된 고사계강창은 구비 전승의 특성으로 인해 직접적인 문헌 기록이 매우 적다. 강창의 전승자인 예인들은 대개 문맹이나 반문맹이었으므로, 전승도 대본을 통하기보다는 스승이 제자를 데리고 다니며 오랜 기간에 걸쳐 구두로 전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형적인 농촌 고사계강창의 초기 역사는 주로 예인들의 증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 -244쪽
농촌 고사계강창에 쓰인 반주악기는 타악기, 현악기였는데, 지역에 따라 구성이 달랐다. 예인이 한 손에 들고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반달형 타악기는, 산동 지방에서는 대개 쟁기 날에서 유래한 쇳조각을 썼고 하북 지방에서는 나무를 깎아 만들어 썼다. 이 타악기의 재료에 따라 이화대고, 목판대고 등의 이름이 생겨났다. 고사계강창의 원형이 형성되기 시작할 때 농민들이 쇳조각이나 나뭇조각을 들고 두들기며 비정형의 짧은 농가를 불렀고, 이것이 점차 정형화되고 완비된 방향으로 발달하면서 이야기를 담은 비교적 긴 작품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타악기로는 북이 있다. 농촌에서는 대부분 북을 다리가 짧은 받침대에 올려놓고 사용했다. -264쪽
농촌 고사계강창 공연 모습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공연은 공연자를 마을로 초빙하여 적당한 공터에서 저녁 무렵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묘회가 있는 날에는 농민들이 묘회 장소로 가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공연자는 먼저 짧은 작품으로 목을 풀고 사람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하는데, 자신은 쇠나 나무로 만든 반달형 짝짜기와 북을 두드리며 노래를 하고 반주자는 삼현을 타면서 반주했다. 공연 내용은 역사나 전쟁을 그린 이야기, 그리고 윤리나 사랑을 노래한 이야기 등으로 다채로웠고, 노랫말은 농민들이 알아듣기 쉬운 구어체로 이루어졌다. 농촌의 고사계강창은 음악적으로는 단조롭고 반복적이었지만 농민들의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오락이었다. -265쪽 도시 고사계강창 공연을 즐긴 청중은 (반)문맹의 하층민부터 지위가 높은 관리나 귀족까지 범위가 넓었다. 북경의 공연장 가운데 서붕자 종류의 공연장을 찾은 청중은 부호, 아침 일을 끝낸 사람, 노인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명지아서장을 찾은 청중은 유동적인 관객들로, 하층민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서관아를 찾은 사람들은 귀족, 관리, 기인旗人 등으로 고정적인 청중이 대부분이었다. -310쪽
농촌 시기의 공연도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지만 농업에 종사하며 공연도 하는 반직업적 성격이 잔존한 데 비해 도시 진입 이후의 예인들은 자신의 기예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야 했다. 이들은 각고의 노력을 거쳐 노천공연 장소로부터 실내 공연 장소로 옮겨가며 도시민들의 인기를 얻고자 했고, 유명 예인들은 고정된 장소에서 이름을 내걸고 오랫동안 공연했다. 예인들은 각자의 장기를 최대한 발휘하여 자신의 조건에 맞는 이야기와 공연 방식을 선택, 개발하면서 청중의 수요에 부응하려 했다. 그 결과 고유한 특징을 가진 다양한 유파가 생겨났고, 장편과 단편의 구분이 명확해졌으며, 단편은 음악적으로 더욱 발달하여 도시 고사계강창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36쪽
청 말엽에 이르러 이 공연작품들이 도시에서 유통되면서 청중 이외의 또 다른 수요를 창출하기 시작했다. 바로 도시화 및 근대적 사회변동과 더불어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 대중이 이 작품들을 보고 들을 뿐 아니라 읽고자 했고, 이에 부응하여 농촌 고사계강창을 바탕으로 하여 각종 형태로 간행된 도서가 급증한 것이다. 농촌에서는 공연 위주로 유통되었으나 도시에서는 공연 외에 출판이라는 유통 형태가 더해진 것이다. -339~340쪽 운문으로만 구성된 고사계강창 가운데 목판본, 필사본, 납활자본이 공연에 비교적 가까우며 7·10언을 기본으로 길이가 자유로운 구절로 구성된 작품이 대부분인 데 비해, 석판본은 공연 기록물이라기보다는 독서를 위해 창작 또는 정리된 측면이 강하고 7·10언의 정형체로 이루어진 작품이 대부분이다. 시기별로 보면 목판본과 필사본이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이고, 석판본과 납활자본은 상대적으로 후기의 것들이다. -406쪽
청 후기 고사계강창은 도광 연간부터 성행하여 특히 청 말, 중화민국 시기에 약 200~300종의 운·산문혼용체 작품과 1천 종이 넘는 운문전용체 작품 등이 방대하게 필사 또는 간행되어 판매나 대여의 형식으로 광범위한 독자들과 만났다. 이러한 대량 간행은 대도시에 살았던 다수 도시민들의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새로 전래된 고속 대량 인쇄술 덕택에 도시 대중독자라는 새로운 시장이 성공적으로 형성되어 성장했다. 한편 청 정부가 민간의 통속문예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결국 붕괴하여 중화민국 정부로 대체된 사회적 여건도 이러한 대량 출판을 가능하게 한 외적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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