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삼국유사』의 왕력편은 『삼국사기』의 연표와 비교해 볼 때 독특하게 기술되었다. 『삼국사기』의 연표는 단순한 연대표에 불과하지만, 왕력편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은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배정됨으로써, 편목 중에 으뜸이라는 인상을 준다. 가장 처음에 설정된 왕력편이 뒤의 8편목 모두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편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기이편과는 표리가 되어 기술되었다. 일연은 왕력편을 바탕으로 하여 기이편을 서술하였다. ― 101쪽에서 ― 『삼국유사』는 모두 5권 9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 번째 편명인 기이紀異는 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기이편 외에도 『삼국유사』 대부분의 내용은 ‘신이神異’한 사실로 채워졌다. 신이한 사실을 기록하다보니 『삼국유사』는 시종 설화로 구성된 느낌을 준다. 연표인 왕력편을 빼면 『삼국유사』의 모든 편명의 조목들은 대부분 신이한 설화로 채워졌다. 『삼국유사』의 각 조목은 하나의 설화로 구성된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개중에는 둘 이상의 설화를 포함하였거나, 한 내용의 설화가 여러 조목에 조금씩 흩어져 기록되기도 하였다. 기이편의 조목은 삼국이 성립하기까지의 여러 국가 또는 주로 신라의 왕들이나 왕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자연히 기이편에 나타난 설화가 국가나 왕들의 정치를 알려준다. 왕력이나 기이편 이외의 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편의 각 조목은 불교를 홍포하려는 내용을 가졌으며, 그 속에 나타난 설화 역시 불교의 연기설화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기이편에 포함된 설화도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소 담았으며, 마찬가지로 기이편 외의 다른 편목에 속한 설화 역시 국가나 국왕의 정치에 관한 내용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 178~179쪽에서 ―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설화는 역사적 사실을 함축해서 알려준다.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려는 의도에서 기이편을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 속에는 많은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었지만, 그 대부분이 신이한 설화 형태로 전한다. 기이편 외에 불교신앙을 홍포하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여러 편목 속에 나오는 연기설화도 불교신앙이나 사상 등 불교사를 밝히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해 주기 때문에 주목된다. 한국고대사를 정립하기 위해 『삼국유사』의 설화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대단히 높다. 한국고대의 정치·사회사를 밝힐 경우 『삼국유사』 외에 『삼국사기』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지만, 고대 불교사를 체계화하는 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절대적으로 참고가 될 수밖에 없다. ― 187쪽에서 ―
『삼국유사』가 신이한 설화를 많이 수록하였는데, 그것들은 대체로 토착신앙이나 전통문화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민간전승이나 고기류古記類의 문서에 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도 『삼국유사』가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을 표방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불교적인 흥국사관興國史觀을 내세웠고, 그것은 토착문화의 전통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졌다. ― 365쪽에서 ―
전체적으로 『삼국유사』는 불교신앙을 홍포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러므로 신이사관은 불교사의 전개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여 신앙의 정당성을 내세우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흥법편 이후 불교신앙의 홍포와 관련된 『삼국유사』의 편목 속에는 일연의 찬讚이 붙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모든 조목에 찬이 나와 있지는 않다. 일연이 찬을 붙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중요도에 차이가 있다. 일연은 흥법편의 모든 조목에 대해 찬을 붙였으며, 의해편에 실린 승려들의 전기에도 대부분 찬을 실었다. 반면 일연은 불교신앙과 직접 관련된 탑상편의 여러 조목에서는 찬을 많이 싣지 않았다. 탑상편의 조목에는 신이한 연기설화가 나타나 있는데, 특히 강조한 것은 찬을 붙였다. ― 370쪽에서 ―
『삼국유사』가 비록 근대사학에서 높이 평가된다 할지라도 일정한 한계성을 지녔다. 신이한 내용으로 민족문화의 전통을 강조하고 문화사를 폭넓게 추구하였지만, 정작 『삼국유사』의 신이한 내용은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것은 불교신앙을 홍포하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에 고려중기에 정립된 유교의 합리주의를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삼국유사』의 신이사관이 합리주의를 수용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였던 것은 근대사학과 궤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다. ― 385쪽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