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일조각의 책들 > 분야별 도서목록
카르툼
마이클 애셔 | 최필영 |
가격: 30,000원
쪽수: 640
발행년/월/일: 2013.12.17
크기: 신국판
ISBN: 978-89-337-0672-5 (03390)
한국의 독자들에게
책을 옮기며
카르툼을 읽기 전에
주요 등장인물
프롤로그: 샤이칸의 대학살
검은 사람들의 땅
마흐디국의 탄생
마지막 열차
세상의 끝
무너진 방진
수단 기계
옴두르만의 원한
에필로그: 남겨진 사람들
역사상 지구촌을 가장 크게 뒤흔든 산업혁명의 종주국은 영국이었다. 그 덕으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신이 여왕을 보호하는 나라로 수 세기에 걸쳐 세계를 호령했다. 영국의 세계 진출은 지구촌의 삶의 조건을 바꿔버렸다. 인디언의 땅, 아메리카대륙은 주인이 바뀌었고, 아프리카대륙은 인신매매와 경제적 수탈로 수난을 겪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고도화한 문명을 누렸던 아시아 또한 새로운 세계질서에 적응하느라 200여 년을 말 못할 혼돈 속에서 지내야 했다. 무엇보다, 이 ‘질서’의 자기장은 여전히 강한 자력을 발산하며 현재에까지 미치고 있다. 따라서 그 자기장이 남긴 흔적을 세밀히 추적하면 할수록 금세기의 국제질서와 변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결국 이 이해의 깊이가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질서’, 즉 제국주의의 자기장이 가장 강력했던 19세기 말, 대영제국의 마지막 모험이라 할 만한 영국-수단전쟁을 다룬 흥미로운 역사서이자, 어떤 소설보다 드라마틱한 다큐멘터리이다.
 
대영제국의 마지막 모험이자 이슬람 원리주의의 출발점
1882년 ‘반외세, 반이교도’의 기치를 내걸고 수단 남부의 나일강에 떠 있는 아바 섬에서 시작된 이슬람 정치운동은 삽시간에 수단 전체와 이집트 그리고 영국까지 뒤흔들어 놓게 된다. 그 주인공은 목수 마흐디와 문맹에 가까운 동네 무당 아브달라히로, 이 둘은 이듬해 영국 장교들이 지휘하는 4만 명의 이집트-수단 혼성군을 상대로 학살에 가까운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때까지 아프리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순수한 독립국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은 자존심을 상했고 중국에서 태평천국군을 진압해 유명해진 고든을 수단 총독으로 임명, 마흐디군에 포위된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 파견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 대중의 영웅이었던 고든은 카르툼에 고립되고 여론에 밀린 여왕의 정부는 대규모의 고든 구원군을 수단에 파견하지만, 마흐디군은 한발 앞서 카르툼을 점령하고 고든의 목을 자른다. 대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이 맨발에 창을 들고 돌진하는 아프리카의 전사들에게 진 것이다. 그 뒤로 13년의 세월이 흘러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은 수단 재정복에 나서고, 영국-이집트-수단 혼성군을 지휘한 키치너는 ‘수단군사철도’라는 누구도 생각지 못한, 사막을 횡단하는 철도를 부설해가며 수단 내륙으로 진격했고, 결국 1898년 9월 카르툼 교외의 벌판에서 벌어진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해 고든의 원수를 갚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위와 같지만, 그 행간엔 수많은 생각거리가 숨어 있는바, 몰입도 있게 읽고 난 뒤로도 쉽사리 책을 덮을 수 없는 매력에 빠지게 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저자가 책 말미에 언급한 대로 수만 명의 마흐디군이 맥심 기관총 앞에서 쓰러져간 옴두르만에 깃든 원한은, 결국 100년 뒤 뉴욕 쌍둥이 빌딩의 폭파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수단의 이슬람 원리주의 정신은 옴두르만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면면히 이어져, 수단에서 4년간 마흐디주의를 수행한 오사마 빈 라덴에게 그대로 이식된다. 마흐디의 유산이 100년이라는 잠복기를 거쳐 21세기 삶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이를테면, 마흐디군은 총을 불순하고 비겁한 무기라고 여겨 적극 활용하지 않았다. 코란에 총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호메트의 원형에 다가간다는 종교적 신념이 낳은 이러한 현상을 비이슬람 문명권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국 여왕에서 베자족 전사까지,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펼치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
그뿐만 아니라, 1955년 수단 내전이 시작된 것도,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이 독립하게 것도 역시 마흐디의 유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우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마흐디의 유산은 100여 년 뒤인 2002년 다산부대와 동의부대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는 것을 시작으로, 2010년 오쉬노부대, 그리고 2012년엔 남수단에 한빛부대가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의 두 번째 매력은 전쟁과 드라마이다. 영국-수단전쟁의 전개 과정은 한 편의 대하드라마와도 같다. 영국 런던의 정가와 여왕의 집무실에서부터 이집트 카이로의 정치인과 군인들, 그리고 광활한 수단 땅에서 저마다 고유의 문화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부족에 이르기까지, 흥미진진한 인물들이 펼쳐내는 대서사는 이 이야기가 논픽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1966년 제작된 영화 <카슘 공방전(원제: 카르툼)>은 당대 최고 배우인 찰턴 헤스턴과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을 맡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는데, 이 전쟁이 그만큼 드라마틱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풋풋한 소위 처칠은 이 전쟁에 참전해 영국군 최후의 기마 돌격을 감행하는데, 이런 모습은 병역 문제가 끊이지 않는 한국 사회와 대비되며 왜 영국이 지금까지 강대국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수긍하게 해준다.
이 책의 또 다른 묘미는 기관총을 중심으로 현대적인 무기의 발전과 전술의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의 마지막에 펼쳐진 이 전쟁은 강력한 화력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 20세기 전쟁 양상의 시발점이라 할 만하다. 특히,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맥심 기관총이 그 위력을 최초로 발휘한 전쟁이기도 한데, 이는 구한말의 동학운동과 의병운동의 좌절을 떠올리며 우리 역사까지 돌아보게 하는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120년 전 영국 일간지에 수록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더욱 생생하게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원서에는 없으나 역자인 최필영 소령이 어렵게 구해서 실은 영국 일간지의 일러스트레이션과 영국 군사 자료를 뒤져 찾아낸 당시의 전투지도에서 발견된다. 사진이 아직 신문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종군기자들이 현장에서 그린 삽화들은 지금의 시각에선 오히려 사진보다 더 생생하다. 당시의 복장, 무기, 장비와 더불어 나일강과 수단의 사막 풍경까지, 삽화로 만나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또한, 역자가 현역 군인인 장점을 살려, 각종 자료에서 찾아 옮겨 실은 전투지도는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들에게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책 속으로

1883년 11월 5일, 샤이칸 전투에서 승리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수단에 마흐디국을 세웠다. 당시까지 아프리카대륙에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곳은 마흐디의 수단뿐이었다. 샤이칸 숲의 패배는 서구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때마침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앞두고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정점에 다다르던 시절, 일개 반군에게 원정군이 몰살되었다는 소식은 빅토리아 시대의 앞길에 큰 숙제를 안겨주었다.
1820년, 무함마드 알리의 군대가 이집트 남쪽 경계를 건너기 전, 수단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황량한 구릉과 산, 계곡과 늪, 호수와 푸른 초원, 불모의 사막과 해안선으로 이뤄진 259만 제곱킬로미터의 거대한 땅덩어리일 뿐이었다. 그곳엔 얼마 되지 않는 초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유목민들이 부족을 이뤄 이리저리 흩어져 살고 있었다. 부족들이 쓰는 언어만도 400개에 달했다. 어찌 보면 수단은 아랍과 아프리카 문화의 혼합체였다. 수단에 아랍인이 정착한 것은 12세기경부터였고 아랍인들은 이 땅을 ‘검은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을 지닌 ‘빌라드 아-수단bilad as-Sudan’이라 불렀다.
지난 400년간 수단에선 부족 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수단 땅에 영지를 건설하자 내란의 양상은 더 복잡해졌다. 18세기까지 수단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은 청나일강 유역의 센나Sennar를 수도로 삼은 푼즈Funj였다. 푼즈는 16세기, 원주민 농민과 아랍 유목민이 연합해 만든 술탄의 영지였으나 잦은 내란을 치른 덕에 1820년대에 들어서서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 채 점점 더 쪼그라들고 있었다. 1821년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침공군이 센나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알바니아 출신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오스만제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이집트 총독까지 오른, 운 좋은 인물이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명목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최고 지도자인 술탄의 부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하는 군주나 다름없었다.
술탄은 세속 군주이자 동시에 최고 종교 지도자이며 세상에 알라의 뜻을 처음으로 전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이다. 따라서 무함마드 알리가 수단을 정복하자 수단은 원칙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영지이면서 동시에 오스만제국의 식민지인 이집트의 식민지가 된, 이상한 형국이 만들어졌다.

<검은 사람들의 땅, 45~46쪽>

 
영국군은 많은 인종의 ‘야만인’들과 싸워봤지만 야만인이 영국군보다 더 용감한 적은 없었다. 제60소총연대 소속의 퍼시 말링Percy Marling 중위는 당시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이번 전투는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다. 누구보다 베자족이 가장 대담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말링 중위가 종교적인 열정이라고 표현한 것은 쉽게 말해 투혼이었다. 베자족은 결코 종교적인 광신도가 아니었다. 베자족의 시체를 살펴본 벌리 특파원은 그들이 자기와 아주 흡사한 모습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랐다. “베자족은 사나운 야만인이나 피에 굶주린 사람이라기보다는 열성적인 사람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중략) 베자족이 보여준 과감하다 못해 무모해 보이는 돌격은 영국군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불러처럼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 싸운 경험이 있는 사람도 이런 형태의 돌격은 본 적이 없었다. 줄루족은 커다란 무리를 이뤄 공격했기 때문에 잘 훈련된 소총수들이 일제사격을 가하고 신속하게 재장전할 수 있으면 제압할 수 있는 표적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혹한 사막에서 성장해 깡마르고 팔다리가 긴 베자족은 느슨한 대형으로 무리를 지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들며 공격했기 때문에 사격으로 제압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이러한 베자족의 용맹함은 훗날 영국 민담에서 되살아났다. 나중에 러디어드 키플링이 쓴 시 「퍼지-워지Fuzzy-Wuzzy」에 ‘1급 전사first-class fighting man’와 같은 구절로까지 등장한다. 에-테브 전투 이후, 베자족이 300미터 안으로 접근해 이들을 막을 확신이 들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라는 지시가 영국군에 떨어졌다. 베자족은 보병이 아니라 ‘명예 기병’으로 취급될 정도였다. 베자족을 상대할 때는 마치 말 탄 사람을 상대하는 것처럼 넓게 열린 곳에서 확실한 방진을 구성해야 했다.
베자족이 영국군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처럼 베자족 또한 영국군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다. 예기치 못하게 패했다는 것이 베자족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들은 과거 6천 년 동안 싸워온 전통이 있었고 ‘야만인’에게 진다는 것은 익숙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들은 으레 그렇듯 이번에 온 ‘튀르크인’ 또한 쉽게 쫓아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불을 쓰는 악마들은 예전처럼 총을 내던지고 도망가거나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자기들을 압도하고 패배시켰다. 이 새로운 ‘튀르크인’은 잔인하기로 유명한 베자식 공격에 맞서 고도의 극기력을 보이며 방진을 유지했다.

<마지막 열차, 221~224쪽>

 
이렇게 만들어진 철도에는 수단군사철도Sudan Military Railway라는 이름이 붙었다. (중략) 1896년에 하루 0.8킬로미터씩 건설할 때부터 견습공으로 일했던 철도 기술자들은 하루에 3.2킬로미터를 설치하는 숙련공이 되어 있었다. 이 노선에 새로운 인부 1천500명이 합류하면서 수단군사철도를 건설하는 인력은 모두 3천 명까지 늘어났다. 3천 명이나 되는 인부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제공하고 만족스럽게 대우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야말로 키치너의 천재성을 발휘하는 데 알맞은 일이기도 했다. 건설 인력 대부분은 철도 부설이 이뤄지는 맨 앞에서 나흘 혹은 닷새에 한 번씩 숙영지를 전진시키며 생활했다. 이 숙영지는 식당으로 쓰는 천막을 포함해 천막 수백 동과 전신, 우편 사무소, 상점, 급수장과 저수조로 구성되었다. (중략)
키치너가 ‘수단 기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바로 수단군사철도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업적 때문이다. 철도 건설은 마치 기계처럼 정확하게 진행되었다. 철도 건설의 선봉은 선로 부설 현장에서 약 10킬로미터 앞에 머물며 작업하는 측량반이었다. 측량반은 키치너가 신뢰하는 젊은 공병 장교 두 명이 지휘했고 그 밑에는 영국 공병 부사관 한 명 그리고 경위의經緯儀와 수준기水準器를 사용할 줄 아는 이집트군 측량병 18명이 있었다.
측량반은 마치 거대한 강철 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철로 건설에서 두뇌 역할을 수행했다. 측량반은 번호가 적힌 나무 말뚝을 100미터마다 박아 나갔다. 얼마만큼 흙을 돋워 토대를 만들지 또는 얼마만큼 땅을 깎아내야 할지를 적은 지시문이 매일 철로 건설 끝자락에 있는 공사 감독에게 전달되었다. (중략) 측량반의 외각 방어를 담당한 아바브다족 낙타꾼들은 무라트에 있는 거점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사막을 순찰했다. 아바브다족 낙타꾼들은 측량반보다 65킬로미터나 앞에 나와 있었기에 설령 기습할 생각으로 마흐디군이 접근하더라도 사전에 기습 의도를 파악하거나 마흐디군의 흔적을 발견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다. (중략) 구름 한 점 찾을 수 없이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사막 위로 철길이 조금씩 길어졌다. 철도대대는 용광로 같은 더위, 아무리 물을 마셔도 풀 수 없는 갈증, 격렬한 노동에 수반되는 허기, 사막의 질병, 그리고 가혹한 모래 폭풍과 끊임없이 싸웠다. 수단군사철도 건설 과정에 몇 명이 죽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하다. (중략)
2년 뒤, 윈스턴 처칠은 이러한 소문을 암시하는 내용을 저서에 남겼다. “누비아 사막에는 무명 흙 무덤이 많이 있다. 이것들은 철도 건설 현장을 따라 숙영지의 이동 흔적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달성되는 것은 없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옴두르만의 원한, 495~501쪽>

 
아브달라히는 마지막 남은 부대를 맨 앞에서 이끌다가 용감하게 전사했다.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아브달라히는 푸르와 안장에 앉은 채 뜻을 함께한 에미르들과 함께 전통적인 방법으로 죽음을 기다렸다. 수단 사람들은 이를 명예로운 죽음으로 생각했다. 개인으로는 영광스런 죽음이었지만 아브달라히와 함께한 모든 이들은 북동아프리카 역사에서 별로 유명세를 받지 못했다. 마흐디가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글은 몰랐지만 거칠 것 없었던 바까라 유목민 덕이었다. 1880년, 피부가 까진 당나귀를 타고 이름 한 줄, 물자루, 그리고 헐렁한 웃옷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이 알-마살라미야로 느릿느릿 들어간 아브달라히는 결국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명목상으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가 마흐디국의 통치자였지만, 아브달라히는 그 국가를 이끌어간 실질적인 정부였다. 사방이 평평한 고즈에 있는 오두막에서 태어난 아브달라히는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웠고, 아프리카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했으며, 그렇게 세워진 나라를 14년 동안 통치했다. 아브달라히의 피는 창을 들고 코끼리와 기린을 사냥하러 다니던 고즈의 붉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고즈는 훨씬 덜 복잡한 세상이었다. 15년 전, 아브달라히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던 샤이칸 숲은 불과 이틀 거리에 있었다.
마흐디국은 움 디바이카라트에서 최후를 맞이했지만, 마흐디가 뿌린 사상적인 영향은 죽지 않았다. 마흐디국이 사라지고 영국-이집트 공동 통치가 진행된 57년 동안 마흐디주의는 지하로 숨어들어 끈질긴 생명을 이어갔다. 1956년 1월 1일에 수단이 독립하자 이슬람에 기반을 둔 정치 세력이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964년부터는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하산 알-투라비가 이끄는 이슬람헌장전선Islamic Charter Front이 수단을 지배했다. 그는 이슬람헌장전선이 마흐디와 칼리파 아브달라히가 구상한 노선을 국가 운영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산 알-투라비와 그의 처남이며 마흐디의 손자로서 움마 당을 이끈 사디크 알-마흐디는 1989년 쿠데타로 당시 대통령인 자파르 니마이리Jaafar Nimairi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현 대통령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를 자리에 앉힌 쿠데타 배후 세력이다.
1994년에는 하산 알-투라비의 후원을 받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 터를 잡고 4년 동안 머물렀다. 이 기간에 하산 알-투라비는 오사마 빈 라덴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사상과 이념에 깊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훗날 명성을 떨친 알-카에다를 건설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1998년, 수단을 떠나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는 오사마 빈 라덴은 처음 수단에 왔을 때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반미反美를 외치며 그리고 아랍 세계에 있는 여러 ‘배교자’ 무슬림 정권을 향해 외친 선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마흐디의 선언과 짝을 이룬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하는 알카에다가 미국 뉴욕의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과 미 국방성 건물을 향해 일으킨 테러 공격은 100여 년 전 마흐디가 등장하면서 주창한 정서와 똑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케라리 전투에서 키치너 원정군의 대포에 스러져간 마흐디군 1만 명의 원한을 갚은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옴두르만의 원한, 616~6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