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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인 이규보
김용선 |
가격: 18,000원
쪽수: 256
발행년/월/일: 2013.11.22
크기: 신국판
ISBN: 978-89-337-0667-1(93910)
머리글  왜 이규보인가? 
 
제1장  수험생
1. 아버지 이윤수
2. 성명재 입학 
3. 사학의 특별교육
5. 국자감시
6. 예부시
 
제2장  관리
1. 구직 
2. 파면
3. 두 번째 구직
4. 좌천 
5. 유배
 
제3장  가장
1. 집안
(1) 친가·외가·형제
(2) 처가
(3) 아내
(4) 자녀
2. 살림
3. 가난
 
제4장  인맥
1. 7현
2. 좌주·동년·문생
(1) 국자감시
(2) 예부시
(3) 문생 
3. 친구 
4. 승려 
 
제5장  음주와 풍류
1. 음주
(1) 주마酒魔
(2) 백주白酒
(3) 질그릇 잔
2. 풍류 
(1) 서실 풍경
(2) 사륜정四輪亭
 
제6장  질병
1. 젊은 시절
2. 질환
3. 의료지식
4. 노병老病과 시병詩病
 
나머지 말
이규보 연보 
끝머리에 
찾아보기
201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미시사적인 관점으로 복원한 이규보 이야기
이 책은 고려사람 이규보李奎報가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탐구한 이야기이다. 이규보가 살았던 12~13세기는 최충헌, 최우 부자로 이어지는 무인정권 시대였다. 당시 격변하던 사회 안에서 그가 살았던 다양한 삶은 비단 이규보(1168~1241)가 아니더라도 당시 고려시대 인물이라면 누구나 겪었음 직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규보에 대한 주요한 기록으로는 그가 남긴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을 꼽을 수 있다. 이 책은 총 53권의 방대한 문집으로 당시 집권자인 최우의 지원 아래 이규보 생전에 출간이 기획되었지만 정작 이규보는 책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 문집에는 시 이외에도 편지, 어록語錄, 기記, 설說, 묘지명, 제문祭文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이 작품들을 문학적 탐구대상이 아닌 이규보 삶의 궤적을 보여 주는 하나의 텍스트, 즉 사료로서 이해하고 분석한다. 하나의 작품이 쓰인 배경이나 상황을 미시사적인 관점을 통해 들여다보고, 더 나아가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뿐 아니라 이규보라는 인물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읽어내는 것이다. 이규보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이 단서가 되어 저자의 서술을 탄탄히 받쳐 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고려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모습과 그가 살던 사회와 세계가 훌륭하게 재구성되어 역사서이면서도 소설처럼 속도감 있게 읽힌다.
 
정치적으로 불우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고려사람
이규보는 꽤나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다. 1168년에 태어나 1241년에 죽기까지 74년이란(당대 고려사람에 비해서는) 긴 생애를 보낸 이규보. 그가 살았던 12~13세기는 별다른 배경이 없는(?) 문인들이 출셋길에 오르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과거 합격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리던 이규보 또한 아버지의 열성적인 기대와 후원에 힘입어 특별 과외까지 받아가며 과거에 응시했으나 여러 번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결국 ‘이인저’에서 ‘이규보’로 이름까지 바꿔 23세의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기는 하지만 합격 후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관직을 받게 된다. 온갖 어려움 끝에 얻은 그 관직이란 것도 중앙 부처가 아닌 먼 지방의 일개 말단 행정직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변 동료들과 불화를 겪다가 그마저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참소를 받아 파직되고 만다. 이후에도 관운이 따라주지 않아 갖은 고생을 겪다가 나이 40세가 되어서야 중앙의 하위 관직, 그것도 임시직을 얻게 되었다. 중견 관리라고 할 수 있는 6품직에 임명된 것은 4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이후는 나름 출세가도를 달렸다고 할 수 있지만 탄핵, 면직, 좌천, 유배 등 고비마다 관료로서의 쓴맛을 골고루 경험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했던 이규보였던지라 가장의 이런 오랜 실직 상태는 이규보 가족의 궁핍으로 직결되었다. 가족의 부양을 위해 본인이 직접 토지를 경작하기도 했지만 의복을 전당 잡혀 좁쌀과 바꿔야 할 정도의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규보는 특유의 낙천성과 넉살로 아내와 아이들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가장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우하고 경제적으로 무능한 이규보였지만 술을 좋아하고 풍류를 즐기는 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최고 권력자의 자제들부터 반체제적인 지식인, 과거시험 동기생, 승려 등 다양한 출신과 성향을 가진 인물들과 인맥을 형성한 이규보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들에게 정신적인 도움은 물론이고 정치적이거나 물질적인 도움도 크게 받았다.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생생한 이야기
저자는 이규보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이규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통해 12~13세기의 고려시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갔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따라서 이규보라는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경험해야 했던 다양한 일들을 구체적으로 추적해 가는 이 책의 서술형식은 일반적인 ‘평전評傳’과는 전혀 다르다. 저자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가의 시각으로 12~13세기의 고려 무인정권 사회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삶은 당시 사회와 어떠한 상관관계를 가졌는가를 살피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미시사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고려시대의 사회사, 생활사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 ‘생활인 이규보’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독자들은 저자가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8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려사람 이규보와의 만나는 감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3장 가장 중에서)

 

40세가 가까워질 때까지 제대로 된 관직 하나 갖지 못했던 이규보였기에 그의 경제적 궁핍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이규보도 그 어려움을 여러 편의 글로 써서 옮기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39세이던 희종 2(1206) 311일 아침에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일은 그의 처지가 얼마나 힘들고 딱했는지 대표적으로 잘 보여 준다.

이날 마침내 집에 식량이 떨어져 아침을 굶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3월 초순이면 춘궁기인 보릿고개의 최절정에 해당되는 시기였을 것이다. 이미 하루에 두 끼씩 먹는 것으로 버텨 왔지만, 허기에 시달린 아이들을 보다 못한 아내는 이규보의 털옷을 전당포에 맡겨 곡식을 구해 오자고 했다. 자신이 손수 만들어 겨우내 남편이 입고 지냈던 바로 그 옷이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아내를 나무라며 반대했다. 3월도 중순으로 넘어가는데, 이제 추위가 다 갔으니 전당포의 주인은 이 옷을 받아 주지 않을 것이고, 추위가 다시 오면 나는 어떻게 올 겨울을 나란 말이오. 이 말을 듣자 아내는 도리어 성을 내며 말했다. 이 옷이 비록 화려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내가 직접 손으로 꿰매 만든 것이라 당신보다 곱절로 더 아껴요. 그러나 굶주림이 더 급한데, 하루에 두 끼라도 먹지 못하면 허기져서 다 굶어 죽고 말 터이니 어떻게 올 겨울을 기다린다는 건가요.

이에 이규보는 할 수 없이 아이종을 불러 털옷을 전당포에 팔러 보냈다. 아마도 며칠 동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값은 쳐 주겠지 기대하면서. 그러나 아이종이 손에 쥐고 온 것은 너무도 뜻밖의 헐값이어서 이규보는 의심이 더럭 들었다. 이 녀석이 혹시 중간에 빼돌렸나? 그래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윽박질렀더니, 아이종은 되레 얼굴에 분한 기색을 띠면서 전당포 주인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봄도 얼마 남지 않아 이제 곧 여름이 오는데, 지금이 어찌 털옷을 팔 때인가. 내가 마침 여유가 있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좁쌀 한 말 값이라도 쳐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이규보는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아내가 힘들게 장만해 준 털옷을 거저 주다시피 겨우 한 말의 좁쌀 값과 바꾸다니. 더구나 명색이 상전으로서 아이종에게 볼멘소리까지 듣다니. 허기진 아이들이 대나무같이 기운 없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면서 기막힌 현실과 자괴감에 어느새 이규보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턱까지 적셨다.

이규보는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았다. 세상일은 전혀 모르고 책만 수천 권 읽으면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윗수염을 뽑는 것보다 쉽고,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사노라면 좋은 벼슬도 쉽게 얻으리라 말해 왔는데, 어쩌다가 운명이 박해서 이다지 궁한 살림을 서러워하게 되었는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도 반성해 보았다. 결국 내 잘못이었구나. 술을 좋아하되 억제하지 못해서 시작했다 하면 천 잔 씩이나 마셔댔고, 취하면 평소 마음에 담았던 말을 참지 못해 모조리 토해 내고는 했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참소와 비방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처신을 한결같이 이렇게 해 왔으니 지금 궁하고 굶주리는 것도 마땅한 일이고, 사람들이 좋지 않게 여기고 하늘도 도와주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허물이고 모든 일이 어긋나고 말았네. , 이것은 내가 스스로 거머쥔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이렇게 자신을 반성한 이규보는 친구 최종번에게 이날 있었던 일과 자신의 심정을 숨김없이 시로 써서 옮겨 주면서, 그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끝맺었다.

 

손가락을 꼽아가며 스스로의 죄를 헤아려서 屈指自數罪

채찍을 들어 석 대를 때렸네 擧鞭而三笞

지난 일이야 뉘우친다고 어찌 미치겠는가마는 旣往悔何及

앞으로 올 일들은 당연히 쫓아가겠네 來者儻可追

-옷을 전당 잡히고 느낌이 있어 최종번 군에게 보이다[典衣有感 示崔君宗藩],

동국이상국집전집 권12 고율시

 

이렇듯 처절하게 자신의 처지를 반성하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으로서 이규보는 이 궁핍함을 해결할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대신에, 솥의 다리가 부러지면 고치거나 새로 사지 않고 다른 것을 괴어서 쓰는 처지가 되어도 절름발이가 된 솥에게 대장장이의 잘못이지 어찌 너의 잘못이겠는가하고 낙천적으로 받아들였다. 숯이 없어서 추위를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여름에도 얼음 없이 더위를 보냈는데 겨울에 숯 없다고 추위 걱정할 게 뭐 있으랴라고 천연덕스럽게 대처할 뿐이었다. 또 친구가 찾아오면, 집에는 돈 한 푼 없는 지경이지만 차마 청담淸談만 나누면서 헛되이 하루를 보내겠는가라고 하면서, 전당포에 옷을 맡겨서라도 대취하도록 만든 대범한 풍류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규보의 문집에 남아 있는 시 중에는 자신의 가난을 풍자와 해학으로 포장하여 반어적反語的 수법으로 쓴 것도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타난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규보는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 주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자신의 가난 앞에서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이고도 낙천적인 사고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으로서의 이러한 모습은 가난과 배고픔과 추위에 떠는 가족들에게 신뢰와 안정감을 주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옷을 전당 잡힌 후 자신의 서글픈 처지를 최종번에게 솔직하게 토로한 앞의 시에서 보듯이, 이규보는 고민을 숨기지 않고 친구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솔직한 점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매우 무능한 가장이고 가끔은 술에 취해 말썽을 일으키는 골칫거리이기도 했지만, 몇몇 친구들과는 매우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규보가 절망적인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친구들 덕택이었다. 12063월에 일어난 이규보의 비참한 집안 사정을 다 들어 준 최종번은, 몇 년 전에 이규보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염소고기의 포를 보내 병구완을 도와주었던 바로 그 인물이다. 또 다른 절친한 친구인 승려 혜문惠文은 숯과 쌀과 솜 등 필수품을 고비 때마다 보내 주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규보의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또 희선사도 매일 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규보의 식구들에게 쌀을 보내 주어 흰 쌀밥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었다.

이와 같이 이규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는데, 그 도움은 피난지 강화江華에서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에도 계속되었다.

고종 19(1232) 6월에 갑작스럽게 강화 천도가 단행되자, 65세의 이규보도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집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온 식구가 하음 객사河陰 客舍의 행랑에서 여러 달 동안 기거해야 했다. 새 서울에 들어간 뒤에 모두가 새로 집을 짓는데 그렇지 못한 이는 이규보뿐이었고, 사람들이 다투어 땅을 구하여 경작하는 판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도 이규보 혼자뿐이었다. 이렇게 몇 년을 살다가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녹봉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양식이 떨어지고 숯이 없어 추위에 떠는 일도 다반사여서 세상에는 궁한 재상이 없는데 나는 최고로 궁하다라고 스스로 탄식할 정도로 늘 가난에 시달렸던 것이다.

이러한 이규보를 두고 친구나 후배들은 쌀, , 채소씨앗과 같은 생활필수품은 물론이고, 병중의 이규보를 위해 복숭아, , 홍시, 곶감, 귤 등의 과일이나 꿩 같은 귀한 음식도 보내 주었다. 많은 사례들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겠지만, 친구들이 이렇게 끝까지 이규보를 도와준 것은 그의 재능을 아낀 탓도 있겠지만, 이규보 역시 친구들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모두 다 털어놓는 꾸밈없고 소탈한 개방적인 성격, 그것이 친구들과 깊은 우정을 쌓게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규보의 친구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 즉 이규보는 어떠한 인맥을 형성하여 사회생활을 해 갔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할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