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 책은 청나라 초기에 벌어진 그리스도교문명권과 유교문명권 간의 도전과 응전을 기록한 문헌으로, 기독교 및 서양 천문학과 역법에 대한 비판과 경계의 글을 모은 양광선(楊光先)의 『부득이(不得已)』(1665)와,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 서양인 신부 이류사(利類思)의 『부득이변(不得已辯)』(1665)과 남회인(南懷仁)의 『역법부득이변(曆法不得已辨)』(1669)을 수록하고, 당시의 반기독교 운동과 관련한 자료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전권에 흐르는 기독교와 서양 천문학을 향한 양광선의 극렬한 비판,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이에 맞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반론을 통해 17세기 중국에서 일었던 반그리스도교 운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명말청초 예수회의 중국 선교와 서양 천문학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583년 중국 본토로 입국함으로써 중국과 유럽, 유교 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다. 리치는 『천주실의(天主實義)』, 『기인십편(畸人十篇)』 등 많은 저술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고 서양의 수학, 천문, 지리 등 과학을 소개하여 중화사상과 송명 성리학이 골격을 이루고 있던 명나라 말기의 중국 사상체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그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한 국가에 불과하고 서양의 지리학적 지식이 더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어 중화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 중국 지식인들에게는 충격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함께 소개된 수학과 천문학 등 서양의 과학문물 또한 중국에서 정통한 것으로 인정되던 것들의 문제를 발견해 내는 데 단초를 제공했다. 리치 사망 이후에는 천문학과 수학에 정통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문물을 소개할 수 있는 각 학문분야의 전문서적을 다량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그중 서양 천문학에 능통한 선교사로 요한 테렌츠, 자코모 로, 아담 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이지조(李之藻)는 명 말의 월력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양 천문학을 이용하여 중국의 월력을 개선할 것을 주장했다. 1613년 조정에 상소를 올려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지 못하는 중국의 회회력과 대통력을 서양의 역법으로 대체하자고 한 것이다. 이어서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린 서광계(徐光啓)가 1629년 황제의 윤허를 받아 흠천감(欽天監)을 설치하고, 서양 선교사들과 이지조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1631년부터 1634년까지 당대의 서양 천문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숭정역서(崇禎曆書)』를 편찬해 냈다. 청나라에 들어와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숭정역서(崇禎曆書)』를 바탕으로 중국 월력을 책임지게 된다. 순치제(順治帝)는 흠천감의 감정(監正)으로 아담 샬을 임명하는데, 이는 그동안 채택했던 회회력이나 대통력이 1644년 8월 발생한 일식의 정확한 예측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반포된 아담 샬의 월력이 바로 시헌력(時憲曆)으로 조선도 이를 받아들여 1653년부터 1910년까지 사용하였다.
동서 문명의 충돌과 흠천감교난 발생 시헌력의 채택은 중국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을 촉발시켰다. 그중 천문학자 오명훤(吳明烜)은 아담 샬이 일식과 월식을 잘못 예측했다고 주장했으나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아담 샬을 탄핵했지만 황실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순치제가 아담 샬을 워낙 확고하게 지지하고 있어 서양 천문학에 대한 반대는 어떤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서양 천문학과 연관된 반그리스도교 운동은 순치제에서 강희제(康熙帝)로 권력이 이동하던 때 발생했다. 강희제가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자 만주족 출신 대신들이 섭정을 하며 개방정책을 반대하고 만주의 전통적인 직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여,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서양의 문물에 배타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반그리스도교 운동을 촉발시킨 인물이 바로 양광선이며, 그가 선택한 공격 대상은 서양 천문학과 아담 샬의 시헌력이었다. 순치제 때 양광선은 아담 샬을 여러 차례 탄핵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강희제 때 만주족 출신 대신들이 섭정을 시작한 틈을 타 ‘흠천감교난(欽天監敎難)’이라고도 불리는, 이른바 ‘역옥(曆獄)’을 일으켰다. 그 발단은 1664년에 올린 「청주사교장(請誅邪敎狀)」이었다. 여기에서 양광선은 탕약망(아담 샬) 등 몰래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이 사교(邪敎)를 전파하여 민심을 어지럽히고 유교의 전통을 훼손하고 있으며 천주교인들의 집회가 역모로 발전된 우려가 있으니 이를 하루속히 쓸어버려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1665년 아담 샬, 페르비스트(남회인), 불리오(이류사), 마갈엥스(안문사) 등은 투옥되었고, 중국 각지의 예수회 선교사 21명, 도미니크회 선교사 3명, 프란체스코회 선교사 1명은 마카오로 추방당했다. 아담 샬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처벌이 미뤄지고, 그의 제자였던 이조백을 포함한 중국 관리만이 사형당했다. 그러나 아담 샬은 문초를 당하며 병을 얻어 1666년에 사망하고, 그해에 예수회 선교사 대신 양광선이 흠천감 감정으로 임명되어 오명훤과 함께 흠천감에서 월력을 제작했다. 섭정에 시달리던 강희제가 1667년 마침내 친정(親政)을 선포하고 그 이듬해 섭정의 주체였던 오배를 투옥했다. 이를 계기로 강희제 초기의 반그리스도교적 분위기는 일시에 쇄신되었고, 강희제의 지시로 양측이 월력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1668년 정월 24일의 하루 길이를 측량하여 중국과 서양의 월력의 정확성을 가늠해본 결과 서양 역법과 페르비스트의 측량이 정확했다. 강희제는 양광선을 파면하고 옥에 가둔 다음 총애하던 페르비스트를 흠천감의 감부(監副)로 임명하고 아담 샬과 이조백은 복권시켰다. 이후 시헌력이 다시 도입되고, 양광선은 참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으나 사면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하였다.
21세기에 다시 보는 『부득이』 유럽 선교사들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세계 선교가 시작된 이래 17세기 선교에 대한 선교지의 반응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는 중국의 기록들이 유일무이하다. 대표적인 기록으로 『부득이』와『부득이변(不得已辯)』 및 『역법부득이변(曆法不得已辨)』, 『파사집(破邪集)』과 『벽사집(闢邪集)』, 그리고 『오문기략(澳門記略)』이 있는데, 이들을 통틀어 ‘명말청초 반기독교문서’라 부르고 있다. 주 내용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비판으로 동서 문명의 충돌이 생생하게 펼쳐져 있지만, 한편으론 새 문명을 대하는 중국 측의 관용과 선교사 측의 적응 현상도 담고 있어 문명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명말청초 반기독교 문서 제1권인 『부득이―17세기 중국의 반기독교 논쟁』에 실린 양광선의 『부득이』상,하권, 『부득이』상권과 짝을 이루는 이류사(불리오)의 『부득이변』, 『부득이』상권 및 하권의 역법 내용을 반박하는 남회인(페르비스트)의 『역법부득이변』은 우리나라에는 처음 번역 소개되는 것으로, 1665년 역옥과 관련된 일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커서 신학,종교학,역사학, 특히 동서 교류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역법의 문제를 떠나서, 외세의 침입을 극도로 경계하고 새로운 문물과 제도를 외세와 한통속으로 보았던 선각자적 경계심은 시대를 초월하여 이질적인 문명이 만나는 역사 현장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