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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末麗初 南宗禪 硏究
조범환 |
가격: 25,000원
쪽수: 296
발행년/월/일: 2013.10.10
크기: 신국판(양장)
ISBN: 978-89-337-0665-7 93910

머리말  

제1편 남종선 수용과 초전승들의 활동   
제1장 도의선사의 ‘설악산문’ 개창과 그 향배  
1. 머리말 
2. 도의선사의 귀국과 설악산 은거  
3. 도의선사의 진전사 주석과 설악산문 개창  
4. 가지산문에서 도의선사의 재탄생 
5. 맺음말  
제2장 원감선사 현욱의 남종선 수용과 활동  
1. 머리말  
2. 현욱선사의 신분과 출가  
3. 현욱선사의 입당 유학과 선종 체득 
4. 현욱선사의 귀국과 신라 왕실과의 관계 
5. 현욱선사의 혜목산 이석과 고달사 주석  
6. 맺음말

제2편 선종산문의 개창과 확대   
제1장 무진주 지역 불교계의 동향과 쌍봉사  
1. 머리말  
2. 무진주 지역에서 쌍봉사의 위상 
3. 정치 세력의 변화와 쌍봉사의 향배  
4. 맺음말 
제2장 서남 지역 선종산문의 형성과 발전  
1. 머리말  
2. 지리산과 초기 선종산문  
3. 서남 지역의 선종 사찰과 산문의 형성 
4. 서남 지역의 선종산문과 장보고 집단 
5. 서남 지역 선종산문의 경제적 기반과 왕실과의 관계 
6. 맺음말  
제3장 굴산문의 성장과 분화  
1. 머리말
2. 굴산문의 발전과 명주에서의 영향력 확대  
3. 굴산문의 분화와 새로운 변화 
1) 행적선사의 활동과 굴산문의 새로운 모색 
2) 개청선사의 활동과 굴산문의 정체성 유지 
3) 굴산문의 분화 배경과 그 의미  
4. 맺음말  

제3편 선승과 정치권력   
제1장 왕실과 선승  
1. 머리말  
2. 기왕의 연구 성과 검토와 문제점 고찰  
3. 선승들과 왕실의 결연 의도  
1) 선승 초빙과 왕실 방문
2) 봉사 요청과 제출 
3) 왕실의 주석처 선정과 선사의 주석 
4) 국사 임명과 활동  
5) 시호와 탑명 요청과 허락 
4. 맺음말 
제2장 장보고와 선종  
1. 머리말 
2. 장보고 무역 선단과 선승들  
3. 장보고와 무진주 지역의 선종산문  
4. 맺음말: 장보고가 신라 하대 선종 발달에 미친 영향  
제3장 후백제 견훤 정권과 선종  
1. 머리말  
2. 상주의 선종 불교 동향과 견훤  
3. 무진주 자립 전후의 견훤과 선종산문
4. 전주 천도 이후 견훤과 선승  
5. 맺음말 

제4편 남종선의 확산과 사회의 변화   
제1장 선종산문과 사원 경제의 발전  
1. 머리말 
2. 해상 무역상과 사원 
3. 선종 사원의 경제력 확대와 해상 무역상과의 관계 
4. 맺음말
제2장 선승과 차 문화  
1. 머리말  
2. 당나라 유학승들의 차 문화 수입 
3. 지리산 자락의 선종산문과 차 문화의 발달 
4. 선승들의 차 문화 향유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  
5. 맺음말  
제3장 선종불교 문화의 확산과 그 영향  
1. 머리말  
2. 입당 유학 배경에 대한 검토 
3. 사상적 전회와 새로운 생활의 체득  
4. 새로운 모색과 탄력적 대응 
5. 불교문화의 수용과 그 영향 
6. 맺음말 

참고문헌  
찾아보기 

이 책은 신라 하대 남종선을 수용한 승려들이 신라 사회에 끼친 영향과 그 의미를 검토한 연구서이다. 나말여초의 전환기를 주도한 인물이 호족이고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종이라는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그 시대를 보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해 나말여초의 정치 및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신라 하대 당나라 유학 선승들
신라 하대에 황해의 거칠고 험난한 물결을 헤치고 당나라에 도착한 신라의 승려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불교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동안 신라에서 주로 공부한 것과는 방법을 달리하는 남종선을 목도하게 되었고 곧바로 그것에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승려들은 화엄을 잠시 제쳐 두고 선종을 체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름난 선승을 찾아가 입실 허락을 받은 다음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마다하지 않고 깨우침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스승의 인정을 받아 심법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다시 화엄 공부를 하기도 했고, 보시행을 행하기도 했다.
그러한 생활 속에서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지자 그들은 신라 사회에 법을 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도의선사를 필두로 홍척선사와 혜소선사 등이 차례로 귀국했다. 이러한 가운데 845년 당나라 무종 황제의 폐불정책은 신라 승려들이 귀국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신라 하대에 선종 불교가 널리 퍼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나라에서 공부하던 많은 승려가 속속 귀국했으며, 전해 받은 법을 신라 전역에 널리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실이나 중앙의 유력한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신라 전역에서 선종산문을 개창했으며 신라 사회의 변혁을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선종을 도입한 신라의 선승들은 신라 왕실이나 중앙의 진골 귀족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러한 인연 속에서 선종산문의 개창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개창된 선종산문에는 많은 승려가 모여 생활했으며, 그들은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원칙 아래 산문을 이끌어 나갔다. 따라서 신라 왕실과 진골 귀족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그들의 청빈한 삶의 모습을 통해 불교의 새로운 측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신라 하대에 선종을 도입한 승려들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나아가는 데 있어 디딤돌 역할을 했다. 또한 그들은 불교계 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신라 말·고려 초 사회의 변혁기를 주도한 여러 부류의 지식인 가운데 한 무리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신라 하대의 승려들이 어떠한 목적에서 당나라 유학을 했으며 그 결과 그들이 도입한 남종선이 신라 하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신라 하대 남종선을 수용한 승려들이 신라 사회에 끼친 영향과 그 의미를 알아내고자 노력한 결과물로, 신라 말·고려 초 전환기 사회의 일부분을 살펴보는 데 있어 하나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말여초의 전환기를 주도한 인물이 호족이고 그들의 사상적 기반이 선종이라는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에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나말여초의 정치와 사상 및 사회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
제1편에서는 남종선의 초전승들에 대해 검토한다. 그중 가지산문의 개산조인 도의선사와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현욱선사를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두 선승은 당나라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깨우침을 얻고 귀국한 이후 주로 지방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하여 가지산문과 봉림산문의 개산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그들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지방 사회에서 어떻게 활동했으며 중앙과는 어떠한 관계를 유지했는지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알아본다. 
제2편에서는 선종산문의 개창과 확대에 대해 구명한다. 먼저 서남해 지역에서 남종선이 발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쌍봉사에 대해서 알아본다. 또한 신라 하대 무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선종산문이 개창되었는데, 그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살펴본다. 나아가 전라도 지역이 아닌 강원도 지역에서 범일선사가 개창한 굴산문이 어떻게 성장하고 분화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제3편에서는 선종 승려들과 정치권력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신라 왕실은 선종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선승들에게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와, 선승들이 신라 왕실에 취했던 정치적인 태도에 대해서 알아본다. 그리고 신라 하대 해상을 주름잡았던 장보고와 선승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더 나아가 후백제 견훤이 선종과 선승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제4편에서는 남종선이 신라에 도입된 이후 신라 사회의 변화에 대해 검토한다. 남종선 도입은 신라 사회의 여러 방면에서 많은 변화를 불러왔는데, 어떤 곳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남종선이 사원 경제의 발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책 속에서

도의선사는 821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지만,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경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왕실이나 진골 귀족을 단월로 삼지 못하였는데, 그것 역시 김헌창의 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 설악산에 들어간 그는 왕실의 배려로 진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진전사와 억성사를 중심으로 설악산문을 형성하였으며 많은 선승이 그곳을 방문했다. 그가 살아 활동하였던 시기 동안에는 물론 열반에 든 이후에도 설악산문은 왕실의 지원 아래 성장했다. 그런데 설악산문에 변화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억성사 출신의 체징선사가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개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설악산문은 가지산문에 비하여 그 영향력이 전보다는 낮아졌다. 게다가 명주에서 새로운 굴산문이 탄생, 발전하면서 설악산문은 그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설악산문의 위상이 약해졌다고 해서 도의선사의 위상까지 함께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도의선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됨으로써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    - 39쪽에서 -

현욱선사는 태어났을 때 진골 신분이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버지인 김염균이 실세失勢하여 정치적인 출세의 길이 어려워지자 출가의 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 현욱선사는 흥덕왕의 요청을 받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흥덕왕의 선종을 통한 개혁 정치에 도움을 주고자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욱선사는 귀국하여 실상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흥덕왕이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의 정치적인 상황이 매우 혼란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민애왕과 신무왕으로부터 제자의 예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실상사에도 변화가 있어 현욱선사는 실상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욱선사는 남악 및 북악과는 거리가 먼 지역을 택하였으며 여주 혜목산에 자리를 잡았다. ~ 이후 경문왕은 현욱선사를 여주의 고달사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는 그동안 여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를 배려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현욱선사는 고달사를 중심으로 남종선을 알렸으며, 염거선사의 제자인 홍각선사 이관이 그로부터 법을 받아 억성사로 돌아가 현욱선사의 법을 전하였다. ~ 원감선사 현욱은 신라 하대 선종의 수용과 그 전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봉림산문의 개산조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 66~68쪽에서 -

신라 하대 무진주 지역에 위치하였던 여러 선종 사찰 가운데 쌍봉사가 주목된다. 누가 개창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개창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선사가 839년 무렵에 머물렀고,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되는 철감선사 도윤도 주석하다 열반에 든 곳이다. ~ 쌍봉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경제적인 지원에 말미암아서이다. 장보고가 쌍봉사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무진주 지역에서 쌍봉사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보고 사후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던 보림사의 보이지 않는 견제를 받아야 하였다. 경문왕은 당나라에서 귀국해 금강산 장담사에 주석하던 도윤선사를 쌍봉사에 주석시켰다. 도윤선사의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인데, 왕실의 그러한 의도는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도윤선사는 경문왕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의 사세를 더욱 확장하였으며 사자산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견훤이 무주 지역의 맹주가 되자 쌍봉사는 다시 견훤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견훤 정권의 보호 아래 계속해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 - 89~90쪽에서 -

실상산문과 쌍계사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게 된 배경은 북종선과 중앙의 지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후 지리산과 멀지 않은 서남지역에 많은 선종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그것은 회진항이라는 항구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유학승이 당나라에 오갈 때 무주 회진항을 통하여 드나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남지역에는 곧바로 새로운 사상이 밀려들어 왔다. 이에 선승들은 무주 회진항과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남종선을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무주를 포함한 서남 지역은 사상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던 곳이다. 그 결과 선종 사찰들이 일찍부터 생겨났으며 쌍봉사와 황학사가 대표적인 사찰이다. 한편 선종 사원과 장보고 집단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우선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남 해안지역의 해적 활동을 제압함으로써 선종산문은 중앙 진골 지배세력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장보고 집단의 활약으로 선종 사원들은 도적들의 침탈에서도 보호를 받았다. 이렇게 볼 때 서남 지역에서 선종산문이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보고 집단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 115~116쪽에서 -

범일선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명주 지역 토착 세력의 후원보다는 오히려 그곳에 외관으로 내려온 진골 귀족의 도움으로 굴산사를 개창하였다. 또한 그는 명주 도독의 힘을 빌려 강원도 지역의 여러 화엄종 사찰들을 선종 사찰인 굴산사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 굴산문의 범일선사가 열반에 든 이후 중심 도량인 굴산사에는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범일선사의 제자 가운데 행적과 개청 두 선사는 굴산사를 벗어나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 굴산문 출신의 개청과 행적 두 선사는 서로 다른 단월세력을 만나 범일선사의 뜻을 유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서로가 굴산문의 정수를 이었다고 하였지만 어쩌면 그러한 주장은 그들이 새로운 산문의 주도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승려의 이와 같은 노력은 결국 굴산문의 분화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굴산문이 오히려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결과까지 불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139~141쪽에서 -

신라 하대 선승들과 왕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둘의 관계가 밀접하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왕실은 여러 가지 의도를 가지고 선승들을 대하였다. 선종 불교가 들어온 직후에는 선승들을 지원하여 교학 불교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며, 선종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포섭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선승들을 왕실로 부르기도 하였다. ~ 그러면 선승들은 왕실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대응했을까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선승들 각자의 태도와 생각이 어떠하였는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선승들도 선종을 널리 홍포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경문왕대와 헌강왕대에 적극적으로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그만큼 그 시기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의 선승들이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왕실과 관계를 가진 선승들은 왕실과 서로 호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라 왕실과 선승들의 관계를 서로 밀접하게 본 것도 문제가 있지만, 소극적이고 비협력적으로 보았던 것도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선승들은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탄력적인 대응을 하였기 때문이다. - 174~175쪽에서 -

무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선종산문이 개창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지방의 해상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장보고의 해상 세력은 선종산문의 개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많은 선승이 장보고 선단을 이용하였으며, 이들은 장보고를 단월로 삼아 선종산문의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결국 장보고의 무역 선단이 신라의 선종을 일으키는 불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비록 장보고가 청해진의 대사가 되어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과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고는 하지만, 그의 정치적인 지위는 보잘것없었다. 특히 중앙의 진골 귀족들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홍척선사를 통하여 자신의 활동을 중앙에 전달하고 나아가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장보고의 선종과 선종산문에 대한 관심은 무진주 지역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드러났다.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선사가 845년 신라로 귀국하기 이전 당나라에서 활동할 때 장보고가 지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무진주를 중심으로 찬란한 선종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정치적인 목적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보고의 죽음 이후에도 선종산문이 크게 성장,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닦아 놓은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94~195쪽에서 -

견훤은 어린 시절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 무진주에 나라를 세운 견훤은 실상산문과 연결되었는데, 이는 선승들과의 연결뿐만 아니라 왕실과 연계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 전주로 천도한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견훤은 신라 말 최고의 선종산문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성주산문이나 굴산문과 연결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산문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 정권과 선종 불교는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있어 그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  218~219쪽에서 -

신라 하대의 사원 가운데에서도 특히 선종 사원은 박래품을 교역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해상 무역상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선종 사원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하여 알려진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토지가 사원의 경제적 기반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신라 하대 선종 사원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 선종 사원은 당시 왕실과도 연결되었지만 지방 호족 세력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당물이 도착하면 선종 사원에서는 지방 호족 세력과 해상 무역상들을 연결하는 역할까지 하였고, 그러한 것을 통하여 사원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9~10세기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신라의 선승들이 오랫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여러 곳을 다닌 결과 중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종 사찰은 해상 무역상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가 되었고 해상 네트워크의 결절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종 사원의 발전과 해상 무역의 발전은 서로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승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233~234쪽에서 -

신라 하대에 선승들이 차를 마시게 된 것은 당나라 유학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일반인들보다 승려들이 먼저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수행의 방편이었으나 나중에는 선원禪院의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 당나라에 들어간 신라 승려들은 남종선을 익히는 과정에서 차에 대하여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특정한 사찰에서 공부하는 동안 차의 재배부터 음용하는 방법 그리고 사용되는 도구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수십 년을 당나라에서 보낸 승려들이 차와 불가분의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무리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차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라에 돌아와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은 왕실이나 진골 귀족들이 계속해서 차를 공양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손수 차를 재배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흥덕왕대에 김대렴이 지리산 자락에 차를 심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 선승들은 차를 오로지 독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마셨다. 혜소선사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차를 통한 평등사상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선승들의 차의 음용이 결국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이끌어내었다고 하면 어떨까 싶다. - 254~255쪽에서-

신라 하대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신라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당나라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국한 이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배층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였다. 신라 승려들이 외국에서 경험한 새로운 체험은 곧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라 하대에 당나라에 간 승려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불교인 선종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선종 사찰에서 공부하면서 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곳 승려들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면서 공부와 수행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생활도 접하게 되었다. ~ 선승들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위하여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신라 사회에 적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심지어 왕에게 정치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신라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당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신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맞이하였다. 신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 유학을 한 선승들의 제자들과 새롭게 당나라 유학을 한 승려들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말여초에 끼친 영향은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매우 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277~278쪽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