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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발자취를 따라 ―한독 관계 : 초창기부터 1910년까지―
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 최경인 |
가격: 35,000원
쪽수: 496
발행년/월/일: 2013.09.12
크기: 152*224
ISBN: 978-89-337-0663-3 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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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조선: 내적 변화와 외적 영향 
1. 16세기 후반까지 조선과 외부 세계와의 관계
2. 조선의 철저한 봉쇄
 
2장  문호 개방에 직면한 조선  
1. 흥선 대원군과 쇄국 정책 
2. 조선과 서양의 첫 만남 
3. 조선의 문을 두드리는 ‘서양의 야만인들’ 
 
3장  1910년까지 한국과 독일의 관계
1. 조선의 문호 개방 
2. 독일인과 조선인의 첫 만남
3.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 
 
4장  한국에서 업적을 세운 독일인 
1.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2. 카를 안드레아스 볼터
3. 요하네스 볼얀
4. 프란츠 에케르트
5. 리하르트 분쉬
6. 앙투아네트 손탁
7.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 선교 활동
 
5장  대한제국의 종말
1. 한국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
2. 일제의 한국 강점
 
6장  1910년까지 한국에 온 독일인
1. 외교관, 공관 소속 직원
2. 한국 관청의 관리
3. 군인과 귀족
4. 상인, 엔지니어, 광원
5. 교수, 교사, 학자
6. 신부, 수사신부(修士神父), 수사(修士)
7. 모험가, 여행가, 작가
8. 민간 선박 선원
9. 기타
10. 가족
 
부록 약어 목록
     참고문헌
     사진 출처
     인명 색인
2013년은 한국과 독일이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지 130년이 되는 해이다. 한독 수교 130주년을 맞아 의미 있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30년 가까이 한독 관계사를 연구해 온 한국외국어대학교 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교수가 한국과 독일이 관계를 맺은 초창기부터 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1910년까지 한국 땅을 밟은 독일인의 목록을 집대성하여 출간한 것이다. 2009년 독일에서 출간된 이후 새로이 찾은 자료와 인물들을 보완하여 한국에서 출간하였다. 크나이더 교수는 한국에 온 독일인들의 이름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각 독일인에 관해 간단한 이력을 일일이 조사하여 기록하였다. 또한 한독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자세하게 밝혔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했던 독일인의 수는 미국인, 영국인, 러시아인보다도 훨씬 적었다. 그렇지만 독일인 몇 명은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또 그 영향력도 상당하였다. 물론 어떤 독일인들의 존재감은 극히 미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는 1910년까지 한국을 잠시라도 방문하거나 한국에서 생활하였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을 언급하고 있다. 외교관, 상인, 엔지니어, 신부, 해병 등 직업과 상관없이 당시 한국에 온 모든 독일인은 한독 관계에 크고 작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이 목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채워갈 예정이라고 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한국과 독일의 관계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한독 관계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 연구 성과도 매우 저조한 실정이다. 더구나 근대기에 한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독일인들을 자세하게 소개한 책은 이제까지 한국에서 출간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 역사학자들에게 한독 관계사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한독 관계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한국에서 활약한 독일인들을 보다 자세하게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당시 조선을 방문한 독일인의 유족으로부터 저자가 직접 받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어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귀중한 자료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책의 구성>
1~2장에서는 19세기 말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조선의 역사적인 상황과 함께 조선의 외교 관계에 대하여 심도 있게 서술하고 있으며, 당시 조선이 쇄국 정책을 쓰게 된 배경 등을 다루고 있다. 3장에서는 1910년까지 조선과 독일제국 사이에 일어났던 정치, 경제, 군사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한 연유와 조선과 독일제국이 조약을 맺게 된 배경을 자세하게 밝혔다. 4장에서는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큰 기여를 한 독일인들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5장에서는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주도권 다툼 속에 한국이 일제에 강제 병합됨으로써 독일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6장에서는 1910년까지 한국에 온 독일인들을 소개하였는데, 인명사전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들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조사해서 밝혔으며, 이들이 남긴 저서나 연구 결과 등을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책 속에서>
카를 귀츨라프는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인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루터교 선교사였다. 그는 통상을 청원하는 편지와 함께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 여러 권과 전도책자를 조선 왕실에 보냈다. 로드 암허스트호가 회신을 기다리면서 서해안 여러 항구에 정박하는 동안 귀츨라프는 육지로 가서 주민들에게 전도책자를 나눠줄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곳곳에 감자를 심고 주민들에게 감자 식용법과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80쪽에서―

독일은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음에도 조선에 대한 관심이 매우 미약하였다. 6월 26일과 28일 독일제국의회에서 조독수호통상조약 비준에 관한 논의를 할 당시에 독일제국의회는 독일 식민지 정책에 대한 기본 원칙에 대해서도 토론하였다. 이때 독일 상인들의 권익은 보호해야 하지만 식민지는 두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보다는 다른 서양 열강의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독일의 경제와 무역을 보호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인이나 외무성이 아닌 상인들이 직접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빌헬름 2세(Wilhelm Ⅱ, 1859~1941, 재위 1888~1918)가 즉위하고 1890년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빌헬름 2세는 동아시아에서 식민지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청의 일부 지역을 식민지로 삼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조선에 대해서는 통상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109~110쪽에서―

조선은 문호 개방 후 외교 통상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1882년 통리아문을 확충 개편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250년 가까이 쇄국 정책을 실시한 까닭에 외교 문제에 관해서는 경험이 부족하였다. 고종은 청에 외무 정책, 해관 업무, 내무 개혁에 대하여 의견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의 내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청의 직예총독 이홍장은 1882년 그의 개인비서이며 법률가이자 중국 학자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穆麟德(목인덕)]를 조선으로 보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 정부 최초의 서양인 고문일 뿐만 아니라 고위직을 맡은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그가 맡은 직책은 다른 서양 열강들이 탐내던 직책이었다. 임기는 3년이었지만 그가 조선에서 행한 개혁과 정치 활동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묄렌도르프는 많은 토론회, 국제 세미나 학술 연구 등의 대상이 되고 있다.  ―111~112쪽에서―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현대적인 해관을 설립하고 경제·정치·행정·교육 개혁의 초석을 놓았던 것과 같이 볼터는 조선인에게 독일의 위상을 알리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1908년 볼터는 한국에서의 24년간의 사업을 접고 아내와 8명의 자녀와 함께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세창양행은 동업자 쉬르바움에게 넘겼다. 쉬르바움은 세창양행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운영하였다.
볼터 가족이 독일로 보내는 짐 속에는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병풍이 있었는데, 이는 볼터 가족과 고종의 개인적인 친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볼터의 쌍둥이 딸들과 황태자(순종)의 우정을 고맙게 여겨 고종이 준 선물이다. 18세기 말 또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10폭짜리 병풍인 「해상군선도(海上群仙圖)」는 신선 12명과 선동(仙童), 여인 10명이 연회에 참석하러 바다를 건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1922년 1월 2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볼터의 외손녀이자 병풍의 소유주인 바바라 미셀 예거후버(Barbara Michel-Jaegerhuber)는 병풍이 한국 국민들 가까이에 있기를 희망하여 2013년 2월 20일에 병풍을 한국으로 보냈다. 이는 100년의 시간과 지구 반바퀴라는 공간을 넘어 돌아온 귀중한 조선 황실의 유물이며, 조선에 온 최초의 독일 상인 볼터와 그의 가족들이 24년을 보낸 조선에서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물건이다.   ―152~153쪽에서―

1909년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로 한국에 온 적이 있고, 1950년 뮌헨 대학의 동아시아 학부에 한국학을 설립한 앙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4) 교수도 프란츠 에케르트를 만난 후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나도 곧 일본과 대한제국의 국가를 만들고 현재 한성에서 군악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를 만났다. 기쁜 마음으로 밤 연주 초대에 응하였다. 그리고 그가 정말 짧은 시간에 45명의 금관악대를 양성한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민요 메들리는 대원들뿐만 아니라 청중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베르디, 비제,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독일 악대가 봤더라면 크게 칭찬하였을 것이다. 8년 동안 프란츠 에케르트는 한국인 박 선생을 부악대장과 그의 후임으로 교육시켰다.   ―182쪽에서―

크뢰벨은 궁내는 물론 고종에게 미치는 손탁의 정치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손탁은 ‘왕비의 관을 쓰지 않은 조선의 왕비’라고도 불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외국과의 관계가 손탁으로 인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나이는 많지만 정신은 아직도 정정한 이 여인의 영향력은 점차 커져만 갔다. 사업권 등과 같은 권리를 조선 정부로부터 신속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받으려고 할 때 손탁과 접촉하였고, 그녀의 개입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녀의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손탁만이 황제와 조선 황실, 그리고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206쪽에서―

독일인이 처음 한반도를 밟은 순간부터 대한제국이 주권을 잃을 때까지 300명 이상의 독일인이 한국을 짧게 방문하거나 한국에서 일을 하고 거주하였다. 미국인과 영국인의 수와 비교하면 극히 적지만 이들을 이 책에서 다루는 이유는 바로 이 독일인들이 독일과 한국의 관계를 형성하고 특징짓는 데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다 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 역할이 미미했던 사람이라도 모두 언급하고자 한다.  ―269~270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