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소개
시마 무쓰히코(嶋 陸奧彦) 1970년대 전반에 한국 연구를 시작한 외국인 인류학자 제1세대. 1946년 이와테 현(岩手縣)에서 태어났다. 1969년 도쿄 대학교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그해 8월 보름간 한국을 방문한 후 이곳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전학공투회의(全學共鬪會議)’(전공투) 투쟁의 여파로 1969년 도쿄 대학교 대학원의 신입생 모집이 취소되는 어수선한 상황을 거쳐 이듬해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그해 가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1979년 토론토 대학교에서 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후 히로시마 대학교를 거쳐 2010년까지 도호쿠 대학교 교수, 2010~2011년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일본과 한국의 대학교수 정년이 다른 덕분에 도호쿠 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두 번의 정년퇴임을 맞았고, 이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1년 동안 방문교수로 체재했다. 캐나다 유학 중이던 1974~1975년 전라도 나주 청산동(가명)에서 현지조사를 한 이래 근 40년째 한국을 연구해 오고 있다. <韓國社會の歷史人類學>(東京: 風響社, 2010)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일찍이 최재석, 김택규 등의 연구서를 일본어로 옮기기도 했다.
옮긴이 소개
서호철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역사사회학/사회사를 전공했고, 대한제국기와 식민지기의 호적과 주민등록 제도에 대한 연구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조선총독부의 통치기구, ‘통계’라는 지식 형태, 도량형과 측정.계량의 역사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식민권력과 통계>(박명규 공저, 서울대출판부, 2003)가 있다.
책 속으로
무료하게 재실에 앉아 있는데, 새하얀 삼베로 된 한복을 입은 어르신이 뒷짐 진 손에 지팡이를 든 채 낮은 문으로 허리를 굽히며 들어오셨다. 백발의 머리카락은 짧게 쳤지만, 길고 멋진 흰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걸음걸이에서도 완고함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잽싸게 담배를 끈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르신은 마루에 올라와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시더니,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물으셨다. “니 누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예, 저는 시마(嶋)라고 합니다. 일본에서 왔습니다.” “흠……, 일본서 왔다꼬? 담배를 끄는 걸 보이, 한국 예절을 잊아뿐 건 아니구만. 그란데, 누구 자식이고?” “저어, 일본 사람입니다.” “그래? 우리 일가 아이가? 성은 뭐꼬?” “‘시마’입니다.” “심(沈) 가라꼬? 이 동네에는 심 가는 없을 낀데. 조상 성묘라도 왔나?” “‘심’이 아니고 ‘시마’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고 일본 사람입니다.” “일본에도 성은 있겠지. 짐승이 아닌 다음에사.” “‘시마’라는 게 일본의 성입니다.” “허어, 일본 간 지는 몇 대나 됐노? 성을 묻고 있지 않나? 왜놈 성(일본식 성)으로 갈았다 캐도, 잊아 뿌지는 않았겠제. 성을 잊으면 조상님께 면목이 없제.” 처음 뵈었을 때의 이 오해는 끝내 바로잡히지 않았다. 어르신은 내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끝까지 이해해 주지 않으셨던 것이다. —‘난세를 살았다: 상봉 어른, 85세’ 중에서
다시 며칠 뒤. 우리는 충청남도 남부 보은읍 근처의 마을을 찾았다. 아침저녁으로 한 대씩 있는 버스도 마을에서 몇 킬로미터 앞의 큰길을 지나갈 뿐인 산골 동네로, 여든 가까운 노부부가 두 간짜리 작은 집에 살고 계셨다. 조부가 여기로 이사를 왔지만, 마을에는 일가친척도 없다고 하셨다. 가난 때문에 이주한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제, 외아들도 서울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뵌 뜻을 듣고 어르신이 꺼내 오신 족보는 붓글씨로 직접 쓴 것이었다. 물론 그 일가 전체의 족보가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지파 부분만이지만, 그것만 해도 두께가 4센티미터나 되었다. 베껴 쓰는 것도 큰일이었으리라. “일가헌티 족보를 빌려다가 우리 애가 일일이 베낀 거유. 한자랑 붓글씨는 내가 갈쳤지유. 암만 가난해두 교육은 제대로 시켜야 허니께.” 그렇게 말씀하시며 어르신은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셨다. “촌동네라 대접할 거이 암것두 읎는디, 그려두 요기라두 허구 가셔유.”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가 들고 오신 상에는 인스턴트 라면에 반 되 남짓한 막걸리가 곁들여져 있었다. 이토록 기억에 남는 라면은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했다. —‘한국의 손님접대: 잊지 못한 만남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