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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생애·사상·업적의 새로운 조명
유영익 |
가격: 30,000원
쪽수: 432
발행년/월/일: 2013.05.10
크기: 신국판
ISBN: 978-89-337-0650-3 93340
 발간사
서문: 우남 이승만을 다시 생각하며
감사의 말씀
 
제1부 생애
 
제1장 이승만의 정치 역정: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1. 청년 이승만 / 2. 밀사 외교와 미국 유학 / 3. 기독교 민족교육 운동과 105인사건 / 4. 하와이에서의 민족교육·선교사업과 1915년의 풍파 / 5.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 / 6.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 7. 상하이에서의 임시정부 대통령직 수행 / 8. 워싱턴군축회의 외교 노력과 임시대통령직 탄핵·면직 / 9. 동지식산회사의 운영 실패와 1931년의 풍파 / 10. 제네바 국제연맹 회의 외교·선전 활동 / 11. 태평양전쟁 기간 임정 승인 외교 활동 / 12.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서의 외교·선전 활동 / 13. 해방과 귀국 / 14. 대한민국 건국운동
 
제2부 사상
 
제2장 이승만의 개혁 건국 사상
1. 기독교 건국론 / 2. 교육 입국론 / 3. 상공업 장려론 / 4. 평등 사회 구현론 / 5. 민주공화제 정부 수립론 / 6. 반공 보루 구축론
 
제3부 업적
 
제3장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거시적 재평가
1. 정치 분야의 업적 / 2. 외교 분야의 업적 / 3. 군사 분야의 업적 / 4. 경제 분야의 업적 / 5. 교육 분야의 업적 / 6. 사회 분야의 업적 / 7. 문화, 종교 분야의 업적
 
제4부 보론
 
제4장 제헌국회 의장 이승만과 대한민국 헌법 제정
1. 해방 전 이승만의 헌법 제정 시도/ 2. 해방 뒤 이승만의 헌법 제정 준비 / 3.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 의장의 역할
제5장 이승만 대통령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동맹 성립의 역사적 의의
1. 구한말 조선의 연미 정책과 개화파의 세계정세 인식 / 2.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위 / 3. 동맹 조약의 내용 / 4. 동맹 조약의 역사적 의의
제6장 3·1운동 후 이승만과 서재필 등의 새 나라 건국 구상: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 결의안을 중심으로
1. 1919년 전후 서재필의 입장 / 2. 총대표회 소집 경위 / 3. 총대표회 개최 목적 / 4. 총대표회 참가자 / 5. 총대표회 진행 상황 / 6. 총대표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의 내용 분석

부록 1. 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 모범적 독립국을 건설하자
       2. 한미상호방위조약(전문)
 
참고문헌
찾아보기
 
 이 책은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인 유영익 교수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키워드인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와 조명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준 이 시대의 필독서로,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학술총서’ 중 다섯 번째로 출간되었다. 50년간 역사학자의 길을 걸어온 저자는 방대하고 치밀한 자료 수집과 분석으로 이승만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을 다루면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승만이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한국인 지도자들 가운데 최상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가장 혁신적이고 순(順)시대적인 개혁 사상과 건국 청사진을 주창했던 뛰어난 정치사상가였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객관적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어떻게 자유민주주의 헌법 탄생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었는지 상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서 어떤 사상과 신념 아래 한미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정치·외교·국방·경제·교육·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을 벤치마킹한 제도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는지 실증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객관적 평가와 현대사 바로 보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승만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갈린다.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독재자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 최근에 이승만을 재평가하자는 움직임이 학계와 언론계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승만의 공(功)과 과(過)를 분리해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는 바람직한 분위기가 자리 잡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승만을 평가할 때,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가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한국 사회의 이념적 경화(硬化)와 맞물려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작 문제는 이승만을 감정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나 이승만을 그저 우상시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이승만을 이해하고 평가한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을 비난하는 주된 논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사상적으로 천박한 인물’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우리나라 안팎 지성계의 오랜 통념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개화기에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의 창간에 참여해 우리나라 언론인 가운데 최초로 근대적인 신문 논설을 썼고,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을 때에도 엄청난 양의 논저를 남긴 인물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승만의 탁월한 역사 인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군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하나둘씩 정복한 끝에, 드디어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격했다. 이로써 미국은 자국의 문명과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데에 수많은 인명과 수억의 전비(戰費)를 허비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동아시아를 시작으로 불행한 사태가 확산한 것은 서양의 정치가들이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팽창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민족은 오로지 한국인뿐이었는데 서양의 정치가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한국을 독립된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일제를 옹호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폭력적인 존재로 육성하는 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은 시종일관 미국을 향해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승만은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지키지 않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점을 뼛속까지 새기고 있었으며, 해방정국과 6·25전쟁 당시에도 신생국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미국의 배신을 다시는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각오로 벼랑 끝 외교에 나섰다.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한미동맹으로 결실을 보았고, 이승만의 표현대로 우리는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누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이는 최근 영토 문제로 중·일 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가는 동북아시아의 현실을 볼 때 그 중요성이 더욱 분명해지는데, 자주독립과 한미동맹을 동전의 양면으로 이해했던 이승만의 혜안과 업적이야말로 다시금 재조명돼야 할 중요한 주제라 하겠다.
이승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직을 유지하면서 허다한 실정失政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이 기간에 그는 6·25전쟁을 극복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식 대통령제를 확립하고, 농지개혁 단행, 63만 명 수준의 상비군 육성, 의무교육제 도입, 양반제도의 근절과 남녀평등의 실현, 기독교의 보급 등 일련의 획기적인 제도개혁을 달성했다. 그런데 이러한 업적은 이승만의 선견지명과 고집이 아니었다면 달성될 수 없는 그 나름의 고유한 업적이었다. 이렇듯 이 책은 이승만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업적을 다루면서 그간 우리가 오해하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사상과 공적을 새롭게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이승만이 사상적으로 절대 천박하지 않았고 그가 추진한 정책은 당대의 어떤 정치인보다 개혁적이고 선진적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이룩한 업적 역시 단연 돋보였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확인해보고자 한다.
 

지은이 유영익(柳永益, Young Ick Lew)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 인문대학원 역사·동아시아언어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휴스턴대학교 역사학과 조교수·부교수,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 스탠퍼드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 그리고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사시민강좌』 편집위원, 역사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창립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이사 등을 지냈으며, 하성학술상, 성곡학술문화상, 경암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동대학교 국제개발협력대학원의 T. H. Elema 석좌교수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편서로 『갑오경장 연구』,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경장』, 『한국근현대사론』, 『한국인의 대미인식』(공저), 『수정주의와 한국현대사』(공저), 『이승만의 삶과 꿈』, 『(이화장 소장)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 전18권(주편), 『이승만 연구—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공저), 『젊은 날의 이승만—한성감옥 생활(1899〜1904)과 옥중잡기 연구』,『이승만 대통령 재평가』(공저),『이승만 동문 서한집』 전3권(공편) 등이 있으며, 영문 저·편서로 Korea Old and New: A History (공저), Brief History of Korea, Early Korean Encounters with the United States and Japan, The Syngman Rhee Correspondence in English, 1904―1948 전8권(주편)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이승만은 역사에 보기 드문 위재(偉才)였다. 그는 청년기부터 일편단심 ‘조선/한국의 독립’을 달성하는 일에 전력투구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재외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된 그는 한민족의 독립을 회복하
려면 미국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미국 위주의 외교 선전 활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념과 출신 지역이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로부터 배척당하고 또 미 행정부로부터 꾸준히 냉대를 받았다.
해방 후 귀국한 이승만은 재빠르게 국내 정치 기반을 구축한 다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난 1946년 6월부터 미국 정부로 하여금 자신이 제창한 남한 과도정부 수립안을 채택하도록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1947년 3월 발표된 트루먼독트린을 계기로 소련과 본격적인 냉전에 돌입한 미국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하자 1947년 9월 드디어 이승만이 주장한 방침에 따라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과 합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유엔 결의에 따른 남한 단독정부 수립안을 새 정책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이승만 외교 독립 노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제1장 이승만의 정치 역정: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중에서, 82~83쪽
 
이승만은 개화기와 독립운동기를 통해 다른 어느 독립운동가나 정치인보다 더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펼치면서‘타의 추종을 불허하는’수준의 문적을 남긴 인물이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집필하고 발표한 신문과 잡지의 논설들이나『독립정신』,『 한국교회핍박』, ≪태평양잡지≫ 등 개인 저서와 잡지 기고문에 드러난 이승만의 정치사상은 집필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참신하고 진보적이었으며 서술 방식이나 문체가 유려하며 명쾌했다. 그가 해방 공간에 발표한「과도정부 당면 정책 33항」과「임시정책 대강」은 서술 기법상 세련되지 못한 점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건국의 청사진으로 손색이 없는 문건들이었다.
이렇게 따져볼 때, 이승만을 ‘지적으로 천박한’ 정치인으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그는 개화기와 독립운동기에 한국이 배출한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지적으로 가장 우수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1896년부터 1949년까지 이승만이 발표한 논저들의 내용을 살펴볼 때, 그에게는 확실히 대한제국(조선왕조)의 중흥에 필요한 개혁 구상과 대한민국 건국에 필요한 국가 건설의 비전이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이야말로 당대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광복 후 한반도에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준비를 가장 잘 갖추었던 정치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2장 이승만의 개혁 건국 사상’ 중에서, 138~139쪽
 
이상에서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이뤄낸 업적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일곱 분야에 나눠 살펴보았다. 그중 몇 가지를 다시 강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 분야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수립한 다음 ‘거의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의회제도를 존속시키고 양당제도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한편,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는 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외교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받아내고, 6·25전쟁의 휴전 과정에서 미국 위정자들을 설득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 분야에서는 6·25전쟁 중 유엔군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과 동시에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하고 나아가 이 전쟁을 계기로 국군의 규모를 ‘63∼70만 대군’으로 육성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구래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그 대신 자작농의 토지 소유제를 확립함으로써 농업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비록 일반 국민의 경제생활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지는 못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전후 경제 복구에 성공했으며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으로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교육 분야에서는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이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다. 나아가 중고등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대학을 확충하며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교육 기적’을 이뤄내 산업화와 민주화에 필요한 고급 인재를 양산했다.
사회 분야에서는 농지개혁으로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 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기회와 취업 기회를 보장하는 정책을 추구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이바지했다.
문화·종교 분야에서 이승만은 한글 전용 정책을 철저하게 시행함으로 본격적인 한글 시대를 개막하고 전통문화의 계승과 보존에 필요한 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한편으로 기독교를 장려해 유교 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룩한 위와 같은 업적들은 대체로 그의 집권 전반기, 즉 1954년 이전에 달성되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그렇게 많은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집념 이외에 여러 가지 다른 요인에 힘입은 바 크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 군정이 추진한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6·25전쟁의 영향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군정기에 개시된 일련의 개혁을 계승해 비교적 쉽게 자기의 개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 두드러진 예는 농지개혁, 교육과 사회제도 개혁, 기독교의 장려 등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자기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업적을 이룩했다. 예를 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63만~70만 대군 육성, 양반제도의 붕괴, 기독교 교회의 폭발적 성장 등은 6·25전쟁이라는 비상한 여건 때문에 가능했던 업적들이다. 말하자면,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자기가 설정한 개혁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있었던 셈이다.
─‘제3장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거시적 재평가’ 중에서, 215~2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