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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상)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 김종학 |
가격: 80,000원
쪽수: 1040
발행년/월/일: 2013.05.10
크기: 크라운판
ISBN: 978*89-337-0649-7 93910
옮긴이 서문 / 일러두기
서(序) / 서언(緖言)
<제1편  근대 조선사 총설>
제1장 근대 조선의 정정(政情)
제1절 척족세도정치의 발달   
제2절 이태왕(李太王)의 즉위, 대원군의 집정
제3절 계유정변(癸酉政變), 대원군 정권의 종말   
제2장  대원군의 배외정책과 열국(列國)
제4절 병인양요, 프랑스 함대의 강화 점령 
제5절 병인양요(續), 제너럴셔먼호 격침 사건, 미국 함대의 강화 공격    
제6절 일본의 조정(調停), 야도 마사요시의 정한설(征韓說)
<제2편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제7절 타이슈 번의 일한외교 관장 
제8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파견  
제9절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의 거부   
제4장 외무성의 일한외교 접수
제10절 판적봉환(版籍奉還)과 일한외교  
제11절 폐번치현(廢藩置縣)과 일한외교의 접수    
제12절 초량 왜관의 접수
제5장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3절 외무성 시찰원의 파견, 통사(通詞) 우라세 히로시의 시안(試案)  
제14절 외무성 파견원의 직접 교섭
제15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16절 일한교섭의 정돈(續), 차사(差使) 사가라 마사키의 동래부 난입(入) 
제6장 정한론(征韓論)
제17절 정한론의 발생    
제18절 정한론의 결렬   
제7장 일한교섭의 재개
제19절 조선의 배외정책의 갱신, 외무성 출사 모리야마 시게루의 조선국 파견
제20절 모리야마 이사관의 조선 재파견, 일한교섭의 재정돈(再停頓)   
제21절 일한교섭의 재정돈(續)
제8장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22절 강화도 군함 운요(雲揚) 포격 사건 
제9장 일한 신관계의 성립
제23절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의 파견
제24절 강화부에서의 예비 교섭   
제25절 강화부에서의 일한회담    
제26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   
제27절 일한수호조규의 체결(續)    
제28절 일한수호조규의 조인과 비준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제29절 모리 공사의 청국 파견, 청 총리아문과의 교섭 
제30절 청한종속관계론, 모리 공사와 이홍장의 회담 
제31절 청한관계의 새 단계, 이홍장과 이유원 
<제3편  일한국교의 갱신과 그 반동>
제11장 병자(丙子) 수신사의 파견
제32절 병자 수신사의 파견 
제12장 일한수호조규부록(日韓修好條規附錄)의 협정
제33절 미야모토 이사관의 파견, 일한수호조규부록안 
제34절 일한수호조규부록의 체결    
제35절 공사주차(公使駐箚)와 국서 봉정 
제13장 일한통상장정(日韓通商章程)의 체결
제36절 일한무역 잠정 약정    
제37절 일한통상장정의 성립, 수출입세의 협정    
제14장 원산 및 인천의 개항
제38절 개항 연기론, 개항장 선정의 곤란
제39절 원산의 개항 
제40절 인천 개항 
제15장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41절 신사(辛巳) 위정척사론, 국왕과 척족의 혁신 정책과 그 반동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제42절 임오병란(壬午兵亂)  
제43절 일본 정부의 대한방침(對韓方針)
제44절 하나부사 공사의 교섭  
제45절 제물포조약의 성립   
제46절 청의 간섭, 대원군의 구치(拘致)    
제17장 청한종속관계의 진전
제47절 청의 종주권 강화   
제48절 조선 조정의 동요     
제18장 갑신변란(甲申變亂), 한성조약(漢城條約)의 체결
제49절 일본세력의 진출과 독립당(獨立黨)  
제50절 다케조에 공사의 적극정책 
제51절 갑신변란 
제52절 일청 양국군의 충돌, 다케조에 공사의 경성 철수  
제53절 일한교섭의 정돈(停頓)  
제54절 이노우에 외무경의 조선 파견 
제55절 한성조약의 체결, 김옥균 등의 인도 요구   
제19장 톈진협약(天津協約)의 성립
제56절 이토 대사의 청국 파견    
제57절 톈진협약의 체결, 일청 양국군의 철수 
<부록>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약전(略傳)  / 근대 조선외교사 연표(1864∼1885)  
주요 인명 색인   /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하)』 차례
 20세기 초, 48세의 길지 않은 생을 살다간 일본의 역사학자,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1897~1945).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찬주임이었던 다보하시 기요시는 조선 근대사 및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분야의 정초(定礎)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받는 학자다.
이 책은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近代日鮮關係の硏究)』 상·하권 중 상권의 완역본으로, 조선 근대사를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이다. 상권 1,133쪽, 하권 969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는 초판이 간행된 지 이미 70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 근대사 내지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에 관한 한 일본 내에서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 식민사학의 극복을 지상 과제로 삼았던 우리 학계에서도 반드시 참조해야 하는 고전으로 인정받아 왔다.
원래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통치에 유익하다고 판단해서 인쇄비를 지급했는데, 당시에는 오직 집무에만 참고할 뿐 일반에 비공개하는 것을 전제로 출간되었다. 그것은 다보하시가 엄밀한 실증주의에 입각해서 역사가의 가치 판단을 최소화한 채 오로지 조선, 일본, 청의 문서 기록에만 의거하여 조선을 중심으로 한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1940년 당시 극도로 우경화한 일본제국주의하에서는 이 정도조차도 불온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다보하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를 도쿄제국대학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장을 맡은 우익 교수가 청·일전쟁이 일본 해군의 음모로 발발한 것으로 암시한 부분을 문제 삼아서 결국 통과시키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보하시가 이 책을 집필한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19세기 동아시아 외교사를 조선을 중심으로 한 내적 동학(動學)의 관점에서 규명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940년 출간 당시 아직 발굴되지 않고 문서고에 비장(秘藏)되어 있던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발굴해서 원문 그대로 수록함으로써 일종의 외교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 이 책이 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을 역설적으로 반영이라도 하듯이 그 내용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비판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책에 수록된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책이 가지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번역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섣불리 번역 작업에 착수하기 어려운 원서의 방대한 분량과 함께 그 초판이 조선총독부에서 출간된 정황에 대한 일말의 위구심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19세기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 및 외교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한 이 책의 특징에도 그 이유가 있다.
이 책에는 조선의 문서는 물론, 중국의 공공기록물 양식인 당안(檔案) 문서와 서간체인 소로분(候文)을 포함한 일본 에도시대 고문(古文) 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전문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을 연구하는 역사가라고 할지라도 이 책 전체를 독해하거나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 역서에서는 원서에 원문으로 게재된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중요한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평이한 우리말로 옮기고, 외교문서 특유의 생경한 단어나 문장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주(譯註)를 부기했다. 다시 말해서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집필 당시 다보하시의 의도가 근대 동아시아 3국의 정부기록과 외교문서를 망라한 일종의 문서집을 편찬하는 데 있었다면, 이 역서는 다보하시가 선별한 문서들의 번역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서가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의 단순한 번역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이 책은 다보하시가 사용한 역사용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는 『근대 일선관계의 연구』가 대단히 실증주의적인 외양을 갖고 있는 까닭에 역사용어마저 친숙한 것으로 바꿀 경우 독자들이 이 책의 서술을 가장 객관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오인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역자는 독자들이 객관적·실증주의적 역사 서술의 이면에 잠복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 주의를 환기해 줄 것을 바란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이 책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지난 70여 년간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많은 사료가 발굴되었으며, 따라서 사실관계에서 새로운 해석을 요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 다보하시 자신도 언급한 제2편의 사료의 편향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조선·청·일본의 기록문서를 인용하면서 근대 이행기 조선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외교사를 세밀하게 서술한 노작으로서 오늘날까지도 조선 근대사 및 근대 동아시아 외교사 분야에서 반드시 참조해야 할 일급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지은이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근대사 편수주임을 역임한 사학자로서 동아시아 3국의 정부문서 및 외교문서 발굴과 엄밀한 실증주의에 입각한 역사 서술을 통해 조선 근대사와 동아시아 근대외교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홋카이도 하코다테 시 출신으로 1921년에 도쿄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문학부 사료편찬소에서 근무했다. 1927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부임하여 194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국사학(일본사) 강좌를 담당했다. 1933년에는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조선 근대사 편수주임이 되어 『조선사(朝鮮史)』제6편(순조~고종 31년, 전 4권)의 편찬을 주도했다. 주요 저서로는 『近代日支鮮關係の硏究』, 『明治外交史』, 『日淸戰役外交史の硏究』 등이 있다.
 
옮긴이 김종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과 해동경사연구소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일하며,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근대 한일관계사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근대한국외교문서』 편찬 사업에 전임연구원으로 참여하여『근대한국외교문서 1~5』(공편, 2010·2012)를 펴냈으며, 『동아시아 개념연구: 기초문헌해제 2』(공편, 한림과학원, 2013 근간)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역서로는 『심행일기: 조선이 기록한 강화도조약』(푸른역사, 2010)과 『근대한국 국제정치관 자료집 1』(공편,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국역 을병일기(乙丙日記)』(국립중앙도서관 한국고전국역총서, 2013 근간)가 있다.
 
책 소개
타이슈 번이 신정부에 일한국교 조정에 관한 건의를 제출한 사실은 타이슈 번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전 쇼군 요시노부와 그 군대가 오사카에서 철퇴해서 교토, 오사카 지방이 평온을 되찾은 메이지 원년 정월 하순 이후의 일이었을 것이다. 신정부는 일한외교에 대한 타이슈 번의 세습 특권을 인정하고 외국관(外國官)[외무성(外務省)] 소관 업무에서 일한외교 관계 사항을 분리해서 타이슈 번에 이양했다. 또 번주 쓰시마노카미(對馬守) 소 요시아키라에게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의 권한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메이지 원년 3월 23일에 태정관의 이름으로 타이슈 번에 명령했다.
이번에 왕정을 일신하여 모든 외국 교제(交際)를 조정에서 취급하게 하신 일과 관련하여 조선국은 예로부터 내왕한 나라이니 더욱 위신을 세우게 하신 뜻에 따라,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양국의 교통을 관장하도록 가역(家役)에 임명하셨다. 대(對)조선국 사무를 처리할 때는 외국사무보(外國事務補)[輔]의 자격으로 근무하라고 하셨으니, 더욱 국위(國威)를 세울 수 있도록 진력할 것을 분부함.
다만 왕정을 일신한 때이므로 해외의 일은 특별히 깊이 유념해서, 구폐(舊弊) 등을 일소하여 반드시 봉공(奉公)할 것.
3월
― ‘제3장 메이지 신정부의 성립과 일한국교의 조정(調整)’ 중에서, 162쪽
이홍장은 우선 모리 공사의 외유와 동양 일반의 정치 문제에 관해 잡담하다가 화제를 전환해서 일청수호조규와 청한종속관계, 그리고 당면한 일한교섭에 관해 모리 공사, 데(鄭) 서기관과 일문일답을 시도했다. 이 회의는 완전히 사적 회담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아문에서의 공식 회담이나 문서의 왕복보다 더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그 중요한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모리 대신: 고려와 인도는 똑같이 아시아에 있지만 중국의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
답: 고려는 정삭(正朔)을 받는데 어째서 속국이 아닌가?
모리 대신: 각국에서 모두 말하길, 고려는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데 불과하며, 중국은 그 전량(錢粮)을 거두지 않고 다른 정사에 관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속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답: 고려가 수천 년 동안 속국이었음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화약(和約)에서 언급한 ‘소속방토(所屬邦土)’에서, ‘토(土)’자는 중국의 각 직성(直省)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내지(內地)니, 내속(內屬)이 되어 전량(錢糧)을 거둬들이고 정사(政事)를 관장한다. ‘방(邦)’자는 고려와 다른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외번(外藩)이니, 외속(外屬)이 되어 전량(錢糧)과 정사(政事)를 예로부터 해당 국가의 경리(經理)에 귀속시켰다. 역래(歷來)로 이와 같아서 본조(本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속국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리 대신: 일본이 고려와의 화호(和好)를 극력 요구하는데 고려에서 일본과 화호를 꺼린다.
답: 귀국과의 화호를 꺼리는 것이 아니라, 저들은 스스로 나라가 작음을 알기 때문에 근수(謹守)해서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각국에 대해서 모두 그러하니 비단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모리 대신: 일본과 고려는 인국(隣國)이니 이 때문에 통호(通好)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고려는 어째서 꺼리는 것인가?
답: 다이라노히데요시(平秀吉)가 고려에서 요란을 일으킨 이후로 아마 의려(疑慮)가 없지 않을 것이다.
데 서사(鄭 署使): 다이라노히데요시 이후 일본과 고려가 왕래를 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단절됐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고려와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했다. 그런데 그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改變)하고 국서(國書)의 자체(字體)도 고친 것을 이유로 저들이 끝끝내 받지 않았다.
답: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려가 감히 서국(西國)과 상통(相通)하지 못하는데 일본이 서양 제도로 고쳤으니, 저들이 저절로 의심을 품어서 일본과 왕래하면 다른 나라가 바로 그 뒤를 따라서 들어올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데 서사: 전에는 사절을 거부하는 데 불과했다. 그런데 근래 일본 병선이 고려 해변에서 담수(淡水)를 구하는데 저들이 갑자기 대포를 쏴서 우리 선척(船隻)을 상괴(傷壞)했다.
답: 그 병선은 고려 해구(海口)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다. 『만국공법(萬國公法)』을 살펴보면 해안가 10리 이내의 땅은 본국의 경지(境地)에 속한다고 되어 있다. 일본이 아직 통상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본래 그곳에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려의 개포(開砲)에는 이유가 있다.
― ‘제10장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체결과 청국’ 중에서, 508~509쪽
첫째, 조선 정부는 그 태만의 책임을 지고 우리나라에 문서로 사죄의 뜻을 표하며, 아울러 다음 조항을 이행해야 한다.
둘째, 우리 요구를 받은 날로부터 10일 이내에 흉도의 당류(黨類)를 나포(拿捕)하고, 우리 정부가 만족할 수 있는 엄중한 처분을 해야 한다.
셋째, 조난자를 위해 상당한 섬휼(贍恤)을 해야 한다.
넷째, 조약 위범(違犯) 및 출병 준비 비용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 배상 정도는 우리 준비의 실비(實費)에 준한다.
다섯째, 장래의 보증으로 조선 정부는 지금부터 5년간 우리 경성주재 공사관을 수호하기 위해 충분한 병원(兵員)을 상비해야 한다.
여섯째, 우리 상민을 위해 안변(安邊) 지역을 개시장(開市場)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상 6개 조건 외에 폭동의 내용과 성질이 최악인 것이 판명될 경우 일본 정부의 최대 요구 한도를, 외무경이 별도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구두 전달했다.
일곱째, 만약 조선 정부의 과실에 중대한 사정이 있을 경우, 거제도 또는 송도(松都)를〇울릉도 우리나라에 양여해서 사죄의 뜻을 표하게 해야 한다.
여덟째, 만약 조선 정부 내에서 흉도를 비호한 사적(事跡)이 있는 주모자를 발견할 경우, 정부는 바로 그 주모자를 면출(免黜)해서 합당한 처분을 해야 한다.
아홉째, 저들의 정상이 지극히 중대할 경우, 강제 배상[强償] 처분을 하는 것은 임기(臨機)의 적의(適宜)에 따른다.
이노우에 외무경은 하나부사 공사와 회견한 결과, 이상 6개 조 내지 9개 조의 요구로도 오히려 보상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메이지 15년 8월 9일부로 다음 4개 조를 추가했다.
첫째, 함흥, 대구, 양화진의〇경기 개방
둘째, 공사관원과 영사관원의 내지 여행권의 획득
셋째, 원산 및 안변(安邊)에서의함경도 일본인에 대한 폭행 사건의 해결
넷째, 통상조약에 관한 양보 획득
― ‘제16장 임오변란(壬午變亂),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의 체결’ 중에서, 716~717쪽
다케조에 공사의 알현이 있은 후 11월 3일에 국왕과 왕비는 척신 및 측근의 중신들을 소견해서 일본 공사의 내주(內奏)의 대요를 전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했다. 척신 민영익은 ‘임오 배상금 40만 엔은 공법상 당연히 반환해야 할 것을 반환한 것으로 원래 일본의 호의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일본 정부의 대한정책은 반복무상(反覆無常)해서 신뢰할 수 없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일본은 마침내 프랑스와 동맹해서 청과의 개전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도저히 국외 중립을 유지할 실력이 없으니 일청 양국의 어느 쪽에라도 보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논하고 국왕은 양국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의향인지 여쭈었다. 왕비가 곁에서 국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민영익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므로, 민영익은 “지나가 현재 쇠하기는 했지만 신의가 있는 나라이니 물론 지나에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진주(陳奏)했다. 왕비가 다시 나서서 “그 방법은 절대 일본당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니 원세개에게 우리의 의뢰하는 뜻을 전달하시오.”라고 주의를 주었으므로 민영익은 즉시 물러나서 청영(淸營)으로 영무처(營務處) 원세개를 방문했다. 국왕은 다시 이조연, 한규직, 윤태준의 세 영사(營使)를 소견했는데 모두 “소신 등은 민영익과 같은 의견이오나 지나와 일본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전하의 현려(賢慮)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진주했다. 또한 이날 척신 민태호도 불렀는데, 그는 혐의를 피해서 사절하고 문서만 올려서 대략 민영익과 같은 의견을 내주(內奏)했다고 한다.
척신을 소견한 후 국왕은 독립당에 속한 협판군국사무 홍영식, 협판교섭통상사무 김옥균을 불러서 의견을 물었는데, 김옥균은 임오 배상금의 반환이 공법상 당연한 것이라고 한 민태호와 민영익의 말을 반박하고, 조선이 하루라도 빨리 독립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일청 양국 중 어느 쪽에 보호를 의뢰할 것인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한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에 왕비는 크게 불만스러운 뜻을 비쳤다고 한다.
― ‘제18장 갑신변란(甲申變亂), 한성조약(漢城條約)의 체결’ 중에서, 8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