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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의 삶과 생각
이익주 |
가격: 38,000원
쪽수: 524
발행년/월/일: 2013.04.20
크기: 152*224
ISBN: 978-89-337-0638-1(93910)
  책머리에
 
  제1장 서론       
  제2장 이색의 삶     
       1. 성장‧수학기     
       2. 관직활동기    
       3. 퇴직‧은거기    
     4. 정치적 시련기     
 
 제3장 이색의 현실인식     
       1. 원-명 교체에 대한 생각  
       2. 유-불 교체에 대한 생각  
       3. 왕조 교체에 대한 생각  
 
  제4장 결론     
  미주
 
 [부록] 牧隱詩藁 작품연보 
          牧隱詩藁 작품연보 해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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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 말의 대표적인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문장가였다. 특히 그가 남긴 문집『목은고牧隱藁』는 그 양과 질에 있어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문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목은고』에 실린 4,262편의 시와 232편의 산문은 고려시대 사회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
이색의 정치적, 사상적, 문학적 위상을 반영하듯 지금까지 이색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다. 정치사와 사상사 등 역사학 분야뿐 아니라 문학 분야에서도 이색은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기존의 이색 연구는 이색을 고려 말의 개혁과 조선 건국에 반대한 ‘온건개량파 사대부’나 ‘구법파 사대부’로 범주화하여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색의 정치사상을 급진개혁파 또는 신법파 사대부와 대비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고려 말의 정치사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이색의 정치사상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단순한 이분법에 빠질 위험이 있다.
 
『목은시고』를 통해 살펴본 이색의 생애와 현실인식
 
이색 연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사용되는 자료는『목은고』에 실려 있는 시문들이다. 이색은 자신의 정치적 주장이나 학문적 견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목은고』의 방대한 시문들이 이색을 연구하는 데 필수적 자료임은 사실이지만, 체계적인 저술을 이용하는 연구들과는 다른 방법을 필요로 한다. 『목은고』에는 이색이 21세이던 1348년부터 68세이던 1395년까지, 거의 평생 동안 지은 시와 산문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이 시와 산문들이 이색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은 아니지만 역사적 사실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나아가 『목은고』의 작품들을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맥락을 파악하며 읽는다면 이색이 가졌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은 『목은시고』의 시문들을 활용하여 이색의 생애를 정리하고 그의 현실인식에 대해 살펴본 책이다. 저자는 이색의 생애를 성장‧수학기(24세 이전), 관직활동기(25~44세), 퇴직‧은거기(45~60세), 정치적 시련기(61~69세) 등 네 시기로 나누어 정리했다. 이를 통해 이색의 개인적인 활동뿐 아니라 친인척, 교우, 사제 관계와 정치 세력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이색의 정치적, 사회적 위상이 변해가는 양상을 추적했다.
또한 저자는 이색이 살았던 14세기 후반을 거대한 변화의 시기로 파악했다. 14세기 후반, 중국대륙에서는 몽골족이 세운 원元이 쇠망함에 따라 한족이 세운 명明을 중심으로 세계질서가 재편되었다. 이런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는 고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국외적인 변화뿐 아니라 고려 내에서도 사상적으로 고려의 지배 이념이라고 할 수 있었던 불교의 지위가 부정되고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면서 크나큰 사회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저자는 이와 같이 세계질서, 지배이념, 왕조 등의 변동이 동시에 진행되는 가운데 이색의 생각과 그 생각이 변해가는 모습을 『목은시고』의 시문을 통해 면밀히 추적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목은집』에 수록된 작품의 연보를 정리해 각 작품이 지어진 시기와 당시의 상황을 해석하고 있다.
 
이색으로 대표되는 14세기 후반 격변기 지식인의 삶과 생각
 
이색은 14세기 후반의 격변기를 어떻게 살았을까. 사람들의 현실인식은 언제나 다양하지만 변동기에는 더 큰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변화에 대한 태도가 각자의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 정치적 성향, 사상적 지향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색을 비롯하여 정몽주, 정도전, 조준, 이숭인, 윤소종, 권근 등 수많은 학자, 정치가들이 고려 말에 전개된 전제 개혁과 척불운동, 조선왕조 개창 등 중요한 고비마다 대립했다. 그중에서도 이색의 위치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단연 독보적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14세기 후반 사회 변동에 처했던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살피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 책은 문집 자료를 이용한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법과 영역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사상사 연구와 구별되는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으로(제2장 이색의 삶 중에서)
 
1388년(우왕 14)은 이색이 61세가 되던 해로, 국가적으로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우선, 염흥방의 가노 이광李光이 전 밀직부사 조반趙톃의 토지를 탈점한 데서 비롯된 옥사로 한 해가 시작되었다. 이 옥사는 염흥방이 조반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켰지만 중간에 우왕과 최영, 이성계가 개입해서 염흥방을 잡아 가두고, 더 나아가 임견미, 도길부 등과 그들의 족당族黨을 대거 숙청함으로써 우왕 즉위 후 형성된 권력집단이 졸지에 몰락하는 대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왕의 왕권이 회복되고 최영과 이성계가 권력을 잡았지만, 이번에는 철령위 문제로 명과 대립하게 되어 요동 출병과 위화도회군이 이어졌고, 그 결과 우왕이 폐위되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무장과 신흥유신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렇게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이색은 정계에 복귀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하지만 무장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정국에서 그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1388년 1월 임견미, 염흥방 등이 축출된 직후에 이색은 판삼사사에 복직되었다. 문하시중 최영, 수문하시중 이성계에 이은 3재三宰의 지위였다. 우왕의 신임과 평소 최영, 이성계와의 개인적인 친분에 더하여 명망 있는 원로 유신이라는 점이 복직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곧 최영과 이성계가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그 갈등은 명의 철령위 설치 통고를 계기로 요동 출병 문제를 둘러싸고 폭발했다. 이색은 요동 출병의 가부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했으나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 요동 출병 도중에 단행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대해서도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태조실록』 총서에서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제압한 뒤 궁궐에 이르렀을 때 “이색이 도성에 남아 있던 기로 및 재추들과 함께 이성계를 맞이하니, 이성계가 이색과 오래 동안 이야기를 하고 군문 밖으로 돌아갔다”고 하여 마치 이색이 회군을 환영한 것처럼 기록해놓았지만, 당시 이색의 위상이나 평소 태도를 미루어보면 오히려 우왕 편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목은집』에 실려 있는 연보에 따르면 이색은 위화도회군이 있던 1388년(우왕 14) 6월에 한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구체적으로는 이성계 등이 개경을 점령하고 다음 날인 6월 3일에 조민수를 좌시중, 이성계를 우시중으로 하는 인사가 실시되었을 때로 보인다. 그렇다면 판삼사사에 복직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다시 물러난 셈이다. 하지만 곧 이성계와 조민수가 대립함으로써 이색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는 일이 벌어졌다. 조민수가 창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색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당시 상황은 다음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조민수가 정비定妃의 전교로 우의 아들 창을 세웠다. 태조(이성계-필자)가 회군할 때 조민수와 왕씨의 후손을 다시 세우기로 의논했고, 조민수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때 이르러 태조가 왕씨를 세우려 하니 조민수가 이인임이 자기를 천거하여 발탁한 은혜를 생각하여 이인임의 외형제인 이림李琳의 딸 근비謹妃의 소생인 창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의 뜻을 어기고 왕씨를 세울까 두려워하여, 한산군 이색이 당시의 명유名儒이므로 그 말을 빙자하고자 비밀리에 이색에게 물었다. 이색 역시 창을 세우고자 하여, “당연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태조가 민수에게 말하기를 “회군할 때에 한 말은 어찌된 것인가?” 하니 민수가 얼굴을 붉히며 말하기를 “원자元子를 세우기로 한산군이 이미 정했으니 어떻게 어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창을 세웠는데 나이 9세였다.
위화도회군 당시 뜻을 같이했던 이성계와 조민수가 후계 국왕의 옹립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가운데 조민수가 이색을 앞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조민수가 자기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색의 의견을 빙자한 것은 위 기록에 보이는 대로 이색이 ‘명유’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때가 이색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