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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
최성은 |
가격: 40,000원
쪽수: 452
발행년/월/일: 2013.04.08
크기: 167*230
ISBN: 978-89-337-0647-3(93600)
머리말
 
Ⅰ. 고려전기의 불교조각
****** 통일왕조의 출현과 새로운 불교미술의 전개
제1장.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후삼국 통일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개태사 창건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분석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경북・충북 일대의 석불들 / 조각장인에 대한 추론 /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 개태사 본존상의 도상 문제
제2장. 광주철불좌상과 통일신라 도상의 계승
광주철불의 조성배경 / 광주철불의 양식계보 / 광주철불의 조각사적 의의
제3장. 중부지역에 확산된 불교조각: 석불과 철불 83
북한산 일대의 석불 / 광주・하남시 일대의 석불 / 안성 일대의 석불 / 평택・시흥의 서해안 일대 석불 / 원주 지역의 석불과 철불 / 충주・괴산 지역의 석불 / 중부지역 불상들의 양식적 특징과 의의
제4장. 미륵존상 조성의 성행: 마애보살반가상과 석조보살입상
보살반가상 형식 / 보살입상 형식 / 보살상의 편년 / 석조보살상의 존명 / 조성배경
제5장. 지방 호족의 불교조각: 강릉・오대산 지역의 석조보살상 147
강릉・오대산 지역의 성격 / 한송사지 석조보살상 / 월정사 석조보살상 / 신복사지 석조보살상 / 조각적 특징과 의의
제6장. 현종대의 석탑 조각과 그 의장
현종대의 불교와 불사 / 예천 개심사지 오층석탑의 부조 /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의 부조 / 개성 현화사지 칠층석탑의 부조 / 제천 사자빈신사지 사사자 구층석탑의 인물상 / 영암사지의 석조의장 / 현종대 석조미술의 성격과 의미
제7장. 새로운 도상의 전래와 수용 226
승가대사신앙과 승가사 승가대사상 / 나한신앙의 성행과 그 미술 / 성불사 마애석가삼존과 십육나한상 / 국립전주박물관 동제 빈도로존자상 / 소조 및 도제 나한상 / 관음보살상의 새로운 형식
 
Ⅱ. 고려후기의 불교조각
****** 정토를 향한 염원과 현세극복
 
제8장. 목조아미타불상의 조성과 복장 묵서명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봉함목 묵서명 /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조성원문 및 개금발원문 /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복장 전적 / 수국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기해명 다라니 및 개금발원문 /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개금발원문 / 아미타불상의 양식 / 아미타불상 조성 배경과 의의
제9장. 귀족적 미의식의 정착: 12세기 말~13세기의 보살상
안동 봉정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 소형 금동보살입상
제10장. 왕실불사와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
민천사의 창건 배경과 그 기능 / 민천사의 삼천불 조성 불사 /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개경 주변의 불상들 / 민천사 금동아미타불좌상과 14세기 중엽의 금동불상들
제11장. 중생구원의 이미지: 14세기의 금동보살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 지순명 금동관음보살입상・대세지보살입상 / 장륙사 건칠관음보살좌상 / 조각사적 의의와 성격
제12장. 현세구복 신앙의 편린: 호지불과 마리지천상
고려시대 밀교와 마리지천신앙 / 고려시대의 호지불과 마리지천상 / 마리지천상의 유래 / 고려 말의 마리지천상 /  마리지천상의 성격과 불교미술사적 의의
 
에필로그
참고문헌
도판목록
찾아보기
2014 세종도서 학술부문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2013 불교출판문화협회 올해의 불서
 
고려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불교가 융성했던 만큼 불교문화도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도 개경의 불상들은 현재 전하는 예가 드물고 불교조각 관련 자료도 적은 편이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주철불이나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상 등에서 고려전기 불교조각의 웅대함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근래에 복장유물을 통해 고려미술의 면면이 드러나고 있는 고려후기 불교조각은 안동 보광사 목조보살좌상이나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등에서 보이듯이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이 책에는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매진해온 저자의 30여 년 동안의 연구성과가 집약되어 있다. 다양한 도상과 양식적 특징은 물론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과 고려인들의 신앙 형태 및 주변국들의 영향에 이르기까지 입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고려의 전 시기에 걸쳐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전개된 고려 불교조각의 변화와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조각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는 하대에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후삼국이 분립한 시기에는 정치・사회적 변화와 함께 경주의 귀족적인 불교문화가 개성과 철원 등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서서히 이식되어 갔다. 이에 따라 통일된 고려왕조 초기에는 지역에 따라 분화된 나말여초의 다양한 불교미술 양상과 통일신라 왕실미술의 전통이 동시에 전개되어 서로 다른 양식과 도상이 공존하였다.
저자는 고려시대의 불교조각을 종래의 시기구분법을 따라 무신의 난이 시작되는 1170년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살펴본바, 이에 따르면 전기에는 다양한 양식적 특징으로 분화되었던 각 지역의 불교조각이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 안에서 서로 융합되고 발전되어 갔으며 사찰의 창건과 중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조성된 웅대한 불상들에는 통일 고려의 국가적 기상이 한껏 발현되었다. 『고려사』권1, 2 ‘세가’의 태조 때 기사만 보더라도 왕건은 즉위 직후 태조 2년(919)에 수도 개경에 법왕사・왕륜사 등 10개 사찰을 창건하였고, 태조 19년(936)에는 개경에 광흥사・내천왕사・현성사・미륵사 등을 건립하였으며 후백제와의 격전지였던 연산에 개태사를 창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경 일대 사찰에 봉안되었던 예배존상들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어 그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후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세운 개태사의 석조삼존불입상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당시 불교미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0세기의 불교조각이 규모가 장대하고 지방화의 특징을 보이는 데 비해, 광종과 성종 연간에 통치체제가 정비된 후 문화적으로 ‘고려’의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현종대 11세기의 불교조각은 단아하고 귀족적인 요소가 나타나고 있어 성격적인 차이를 보인다.
고려후기에 이르러 12세기에는 수선사와 백련사와 같은 결사운동이 일어났으나, 13세기에 장기간 몽골과의 전란을 겪으며 정토를 염원하는 신앙이 유행하게 되고, 그 뒤 원 간섭기에는 지배층들이 불교교단과 유착되어 기복적으로 기울면서 결사운동은 힘을 잃고 정토왕생을 구하려는 신앙 경향이 더욱 성행하여 아미타불상이 전국적으로 조성되었다. 또한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의 왕실 및 귀족들에 의한 국가 차원의 불사 외에도 일반 기층민에 의한 불사활동도 매우 활발히 이루어져 현세의 복을 구하고 안녕을 염원하며 소형 불감과 호지불, 호신패 등 다양한 조각들을 만들어 지니게 되었다. 조각기법도 세련된 수준으로 발전하여 많은 걸작들을 남겨 고려후기는 명실공히 불교조각의 성숙기라 불리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의 한계와 극복
 
전반적으로 고려시대의 불교조각은 학술적 근거가 될 유물과 복장유물 등 자료의 부족으로 주변 자료와의 비교 연구와 추론에 많이 의존해야 하는 만큼 연구에 어려움이 따른다.
우선 개경의 여러 사찰에 봉안되었던 불상들이 거의 전하지 않고 있어 존상의 조성배경을 명쾌히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방 소재의 불상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법주사가 손꼽히는 법상종 사찰로서 왕실에서 출가한 승려들이 주석하였던 곳이었던 만큼 상당한 실력을 갖춘 조각가에 의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조성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가 전하지 않는다.
자료 문제 외에도 북송이나 요, 원 등으로부터의 영향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말하기 어렵다. 고려가 거란의 침입 후 요의 연호를 쓰면서 문화적으로는 북송의 문물을 수용하며 이중적인 교류를 하였는데, 요가 당 말의 불교와 그 미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북송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한화(漢化)되어 갔음을 고려하면 요의 미술을 북송의 미술과 구분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그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 원의 영향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말할 수 없다. 원 간섭기에 원의 공주들이나 친원세력을 따라 고려에 왔던 원의 장인들을 통해 티베트 불교미술이 전래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또 티베트 승려들이 원에서 활약하고 연경이나 항주 등지에 티베트 불교미술 요소가 보이는 불상들이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 제한적으로 나타났다가 명대 영락(永樂) 연간에 이르러서야 유행했다는 점, 조선초기 15세기 불교조각의 세부장식에서만 그 요소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티베트 불교미술이 고려 불교계에 전폭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를 성실한 연구로써 극복해 내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점은 유물과 자료에 대한 정밀한 고고학적 연구, 1차자료와 선행연구 등의 문헌 연구 중 어느 것 하나에만 치중하지 않고 균형 잡힌 연구를 해왔다는 것이다. 조각 전체는 물론 세부장식에 이르기까지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과 비교 등을 통해 양식의 특징을 찾아내고 있다. 풍부한 도판을 함께 제시하여 마치 유물을 줌인하며 보고 있는 듯하다. 고려사,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우리의 역사서와 중국의 역사서 등에서 정치・사회적 배경을 찾아내고, 불교경전 및 여러 문집 등에서 당시의 지배적인 정신세계를 추론하고, 조성발원문과 비명 등을 해석하여 직접적인 조성배경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고려의 사회와 문화의 변화와 흐름을 추적하고 고려인들의 생활상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풍부한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30여 년간의 연구성과를 종합하고, 이를 6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새로이 발굴되는 자료를 업데이트하는 작업을 통해 고려 전 시기를 아우르는 불교조각 연구서를 펴내게 되었다.
 

책 속으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개태사가 창건되던 고려 초는 불상의 재료 면에서 철불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를 입증하듯이 고려의 주요 지배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중부지역에는 고려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철불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개태사에는 당시 유행하던 철불좌상이 아닌 석불입상이 주존불로 봉안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나 비보사상裨補思想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개태사를 창건하면서 이른바 창건주인 태조나 그 측근세력들이 개태사 불상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와 상징을 전하고자 했는가, 다시 말해 조각가들에게 그들이 제작한 불상에서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요구하였을까 하는 문제와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태사가 창건되던 무렵 왕건과의 연계 아래 창건 혹은 중창된 사찰 가운데 문헌기록과 불상이 함께 전하는 사찰은 대체로 운문사雲門寺, 직지사直指寺, 삼화사三和寺를 꼽을 수 있다. 운문사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보양寶壤의 조언을 받아 전쟁에 승리한 왕건이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지은 사찰이며, 김천 직지사는 직지사사적直指寺事蹟에 능여能如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삼화사 역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석식영암기釋息影菴記에 태조가 통일하고 나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세 사찰에 전해오는 불상들(운문사 석불좌상(1-16),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1-17), 직지사 석조약사불좌상(1-18))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직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불신이 아담하고 얼굴이 여성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들로서 동화사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1-15)이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3-15)과 같은 신라하대 9세기 불상의 양식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상들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요구되었을 것이며, 결국 나말여초기에 활동하던 여러 조각장인 집단의 다양한 불상 유형 가운데 예천 동본리 석불입상(1-10)이나 봉화 천성사 석불입상(1-11) 같은 거대한 규모의 석불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거대한 규모의 석조삼존불상으로 조성하면서 개태사 삼존불의 본존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한 것은 입상이 부처님의 유행상遊行像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1장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후삼국 통일중에서, 44~45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11-1)은 충청남도 서산군 부석면 부석사浮石寺에서 조성된 상으로 복장 조사에서 주성기鑄成記가 발견되어 천력天曆 3(1330)에 만들어진 것이 밝혀졌다.

부석사는 의상義湘스님이 통일신라 초에 창건한 신라화엄의 근본도량인 영주榮州 부석사와 동일한 이름의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수도 개경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어렵지 않게 연결될 수 있는 서산 지역에 앞에서 살펴본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나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그중에 영주 부석사와 같은 이름의 부석사도 세워진 것이다. 현재부석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이 금동관음보살상을 통해서만 고려시대의 면모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지본묵서紙本墨書의 조성발원문(11-2)에는 고려의 서주瑞州(서산) 부석사에서 당의 주존主尊인 관음상 한 구를 주조함으로써 현세에서는 재화災禍를 없애고 복록을 누리며 내세에는 아미타정토에 함께 태어나기를 바라는 계진戒眞을 비롯한 30여 승속인僧俗人들의 간절한 발원이 담겨 있다. 이 발원문 외에도 복장 속에는 종자만다라種子曼茶羅(분실), 옥제품玉製品, 동령銅鈴, 수정水晶 등의 여러 복장물이 들어 있었고, 특히 인간의 오장육부를 표현한 오색의 천과 곡물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보살상은 대좌와 광배를 잃었고 보관과 지물持物도 없으나 상 자체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체구는 풍만한 편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방형의 얼굴은 예배상으로서 위엄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차분한 여성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세부표현을 살펴보면, 높이 솟은 보계는 끝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진상태로 같이 묶여 있으며 앞머리는 중앙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대칭되게 새겼다. 얼굴의 각 부분도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표정이 단아하고 양어깨 위에는 수발垂髮이 흐르고 있다.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였고 영락은 가슴뿐 아니라 무릎에까지 화려하게 걸쳐졌다. 착의법을 보면, 마치 여래상의 대의大衣 같은 윗옷을 입었고 왼쪽 가슴에는 내의 치레장식이 있으며 허리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있다.

이 부석사 상과 형식이나 양식 면에서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유형의 예로는 국립전주박물관의 금동보살좌상(11-3)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모든 점에서 부석사 상과 일치하나 상투(보계)와 앞머리, 얼굴 등의 각 부분 조각에 조금 더 깊이가 느껴지고 체구도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이다. 반면에 승각기 치레장식은 내부에 무늬가 새겨지지 않고 장식술도 달리지 않은 모습이어서 부석사 상보다 조성시기가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상들에서 보이는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 얼굴과 몸에 살이 많은 풍만한 표현은 부석사 상과 같은 해에 그려진 교토京都 호온지法恩寺 소장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1330)(11-7)의 보살상들과 같은 14세기 전반 불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어, 조각과 회화라는 차이는 있으나 당시 유행하던 보살상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부석사 상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현존하는 14세기 상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민천사旻天寺 금동아미타불좌상(10-2)이 있다. 이 상은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충선왕 5(1313)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민천사 상의 왼편 가슴에 조각된 눈에 띄게 커다란 내의 치레장식은 부석사 상의 다소 정형화된 내의장식보다 이른 표현이다. 민천사 상에서처럼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에 몰려 있는 살찐 방형의 얼굴과 둥근 육계는 도쿄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의 대덕 10년명아미타여래도(1306)(10-9)에도 나타나는데, 이와 같이 풍만해진 방형의 얼굴이 점차 정형화되면서 부석사 상이나 국립중앙박물관 금동 관음대세지 보살입상으로 이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11장 중생구원의 이미지:14세기의 금동보살상중에서, 362~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