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6·25전쟁은 국제적으로 냉전 체제를 심화시켰고 국내적으로 분단 체제를 고착시켰다. 이념적으로 볼 때, 남한에서는 반공 이념이 북한에서는 반미 사상이 국가와 사회 모두에 지배적인 것으로 되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전쟁의 상처가 남긴 뿌리 깊은 적대 의식과 상호 불신감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정부와 국민 양자에 내재한 적대 의식과 불신감은 지금까지 통일 논의가 큰 성과 없이 공전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이 점에서 6·25전쟁이 분단 고착화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이러한 분단의 공고화는 ‘남침 위협’과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을 내세운 양 정권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악용되어 더욱 굳어졌다. ― 58쪽 ―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아무리 상처를 받고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세우면서 일단 거역할 수 없는 명분으로 자리 잡았고, 그 명분이 결국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정신적·도덕적 힘을 마련해 주었다. 자유민주주의의 명분이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도 민주화 운동의 도덕적·이념적 동력을 제공했고, 심지어 권위주의 세력도 민주주의의 명분을 정면으로 부인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자기 나름대로의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도덕적 지배력은 한국에서만의 현상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따라서 준비가 안 된 한국에 민주주의가 심어졌고 그것이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렸지만, 민주주의의 명분은 깊은 뿌리가 되어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게 했던 것이다. ― 61쪽 ―
4·19는 해방 이후 한국에 도입된 한국 민주주의가 이승만의 개인적 통치로 시들어 가던 현실에서 이를 되살릴 기회를 제공했고, 더 나아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힘으로 집권자를 교체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또 이러한 성공이 이후 독재 권력 앞에서 민주화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게 한 중요한 정신적 원동력이었고 역사적 교훈이자 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4·19 운동의 정치사적 의미는 지대하다고 하겠다. ― 112쪽 ―
18년에 걸친 박정희 통치는 그 이전까지의 한국 정치의 파행이 심화된 결과이면서 그 뒤에 나타난 숱한 정치·사회적 모순들의 근원이기도 하다. 박정희 통치를 통해 한국 정치는 권위주의 독재와 민주주의 사이의 투쟁이 본격화되었고,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제들을 겪게 되었다. 이전의 정치 변동이 권위주의 독재와 자유민주주의적 이상 사이에 발생한 명백히 정치적인 갈등의 결과였다면, 이제 그 정치적 갈등에 자본주의 산업화의 모순이 중첩되어 정치 변동은 더 복잡하고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된 것이었다. ― 137~138쪽 ―
유신 체제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탄압적인 정치 체제였다. 정치적 자유가 말살되다시피 했고, 일인 장기 집권 체제가 보장되었으며,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금지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헌법 자체에 대한 언급조차 금기 사항이 되었다. 이런 체제를 집권자는 통일 여건 조성을 위한 효율적인 체제이며, ‘한국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민간 사회는 억압받았고 정치 사회는 질식되다시피 했다. ― 173쪽 ―
박정희가 피살되자 한국에는 민주주의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모든 국민이 그러기를 바랐고 모든 정치 세력이 유신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대부분의 정치 세력들이 최소한 겉으로는 다시 한 번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심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민주화 세력과 권위주의 군부 세력의 힘겨룸에서 민주화 세력이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 세력의 힘은 유신 기간 동안 성장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군부 세력을 축출하기에는 모자랐다. 거기다 민주화 세력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단합된 힘을 모을 수가 없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명분으로는 원하되 민주화 운동에 나서기는 거부한 중간 계급의 이중성 또한 군부 세력의 재집권을 돕는 결과를 초래했다. ― 213쪽 ―
한국의 민주화는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가 아니라 과거 권위주의의 구조와 인맥이 점차 희석됨으로써 이루어진 점진적 진화의 형태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진화의 과정을 요약하면, 노태우 정권에서 민주화가 처음 시작되었고, 김영삼 정권에서 민간화가 완성되었으며, 김대중 정권으로 접어들면서 야당에 의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져 명실상부하게 민주주의가 공고화 또는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 258쪽 ―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된 민주화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를 거치면서 심화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군부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함으로써 민간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고, 김대중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성취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한국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국가의 민간 사회에 대한 통제가 줄어들고 시민 사회가 성장했으며 민주적인 정치 제도들이 성숙해 갔다. 그러나 그 민주화는 대중의 적극적 참여나 분배 구조의 개선보다는 권력과 돈이 엘리트 중심으로 집중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런 상황이 계급들 사이, 또 계급과 국가 사이의 대결을 불러와 한국 정치는 혼란을 겪었다. 그뿐 아니라 흔히 ‘3김 정치’로 일컬어진 지역 붕당 체제가 확립되어 한국 정치는 지역주의와 ‘제왕적’인 일인 통치의 모습을 보였다. ― 281쪽 ―
노태우 정부 출범에서 시작하여 노무현 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한국 정치는 착실하게 진화해 왔다. 민주 헌법과 민주 정부의 탄생(노태우 정부), 민간화의 완성(김영삼 정부), 사상 최초의 평화로운 정권 교체(김대중 정부), 그리고 일인 지배 체제의 종식(노무현 정부)의 정치적 진화는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대한민국 국민의 업적이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로 변했다고 해서 그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거나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결함투성이이고 사회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고 있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에 와서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모습도 보였다.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는 그 ‘질’이 높다고 할 수 없다. ― 317~3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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