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왕징웨이는 1905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쑨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의 핵심 구성원이자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의 주요 필자로서 공화혁명과 반만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시기에 왕징웨이가 주장한 민족주의는, 이후의 5·4운동 단계에 나타나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이른바 반제민족주의와 비교할 때 종족주의라는 상당한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7~28쪽
신해혁명 이전부터 왕징웨이를 비롯한 혁명파와, 량치차오梁啓超가 중심이 된 입헌파가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부분은, 혁명이 가져올 정치적 혼란과 이를 노린 열강의 침략, 그 결과 초래될 중국의 분할 가능성 문제였다. 열강의 중국 분할을 둘러싼 혁명파와 입헌파의 논쟁에서 입헌파는 혁명의 혼란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과분이 초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미연에 피하는 방법으로 평화적인 개혁, 곧 군주제하의 입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를 비롯한 혁명파는 무능한 청조의 존재야말로 과분을 초래할 근원이기 때문에 청조를 타도해야 과분을 피할 수 있다고 공박했다. -38~39쪽
1925년 9월 말경에 확립된 연합체제는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상호보완적 필요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가능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강한 신임에 의해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발탁됨으로써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광저우에서 그의 정치적 경력은 일천하였고 정치적 기반도 거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을 가진 동반자나 지지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왕징웨이도 광둥정권의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군사적 기반 세력인 장제스의 지지가 자신의 정치지도권 확립에 필요불가결했다. -87쪽
독자적인 군사적 기반을 갖지 못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독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중산함사건 직후 왕징웨이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각 군의 영수들은 중립을 고수했고, 최후의 지지자로 여긴 보로딘과 소련 측도 왕징웨이의 입장을 지지해주지 않았다. 국민정부 주석이자 군사위원회 주석인 왕징웨이의 권위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의 낭만적 기질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그로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106쪽
왕징웨이 개인의 정치사상이나 정치행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대목은, 당시의 그가 기본적으로 이론가나 사상가라기보다 선전가 역할에 치우쳐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반제에 대한 수용과 고양, 실천의 각 단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이념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혁명이론을 제기하는 역할을 감당했다기보다 국공합작 노선이나 북상, 국민회의운동, 북벌과 같이 주어진 정치적 상황 속에서 코민테른과 공산당이 제기한 반제 노선을 적극 수용하고 전개하는 선전가 역할을 주로 했다. -127쪽
왕징웨이는 기존의 안내양외와 ‘일면저항 일면교섭’을 고수하여 장제스 혹은 국민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그의 주장은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그리고 그 전쟁에서 중국의 승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경우 일본과의 평화교섭에 나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했다. 즉, 항일전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전쟁 상황에 따라 대일강화 또는 친일 전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띠고 있었다. -170쪽
1937년 7월,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7·7사변)으로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한 뒤 6개월도 못 되어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창장 강 중류의 거점 도시 우한으로 옮아가야 했고, 국가 존망의 위기는 극에 달했다. 앞에서 지적했듯 중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장제스와 왕징웨이를 비롯한 국민정부 지도자들은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부저항주의로 알려진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 대일 전략의 바탕에는 군사력에 대한 이러한 일관적인 평가와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장제스와 왕징웨이 등은 ‘일면저항 일면교섭’과 장기항전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1938년 10월 광저우와 우한 함락을 전후하여 전쟁의 장래에 대한 비관론이 국민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자, 일본과 협상하여 강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이른바 화평론이 대두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71쪽 ‘협의기록’은 이른바 ‘신정부’ 건설 절차도 규정했다. 일본 정부 측이 중일 간에 합의한 시국 해결 방침을 발표한 다음 왕징웨이와 중국 화평파 인사들이 장제스와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 제휴와 반공정책을 공동으로 발표하며 신정부 성립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최종 협의기록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협의 과정에서 중국 측이 기존의 친일정권인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상하이의 유신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 영도하의 신정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한 왕징웨이가 충칭을 떠나 화평협상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 동시에 장제스 휘하의 충칭 국민정부군(중앙군)이 왕징웨이를 편들게 될 쓰촨, 윈난의 군대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펴 중앙군의 후방을 끊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81~182쪽
장제스가 왕징웨이의 탈출 사실을 안 것은 12월 21일 윈난 성장 룽윈의 12월 19일자 전보를 받고나서였다. 룽윈의 보고는 “왕징웨이가 18일 쿤밍에 왔다가 19일 오후에 하노이로 떠났는데, 떠나면서 일본 측과 화평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장제스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의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184~185쪽
왕징웨이가 화평운동으로 기울어지게 데에는 그의 정치 일생에서 확인되는 여러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쑨원 사후 끈질기게 이어진 장제스와의 권력투쟁에서 맛봐야 했던 좌절과 패배,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서 경험한 공산당과의 합작 실패와 그로 인한 철저한 반공, 국민혁명 시기에 경험한 반제 실천의 한계와 그로 인한 반제 실천으로서의 항일에 대한 좌절감과 무력감, 혁명을 위한 무정부주의적 자기희생 등은 바로 이러한 경험적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측면들이다. -259쪽
신해혁명 발발 이후 오족공화론을 수용하며 나타난 반만민족주의의 변화 과정에는, 전통적 중화주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족 중심의 종족적 민족주의로는 변경 지역들의 독립 요구로 표면화되고 있던 ‘과분의 위기’ 속에서 국내 민족들 간의 진정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이 내재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 내 민족들 간의 대립과 모순이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었다. 쑨원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1920년대 이후에도 한족 중심의 민족융화 주장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거듭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반만민족주의가 가지는 종족주의로서의 한계, 즉 중화주의적 잔재의 청산은 오늘날까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262~263쪽
왕징웨이의 정치 일생이 보여주는 민족주의의 변화 과정이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기본적인 흐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반만에서 반제로, 다시 반제 실천의 좌절로 변화한 과정이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본류를 구성한다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에 비하여 왕징웨이 정치 일생의 최후 단계에 해당하는 친일 전변을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흐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흐름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 책에서 강조한 점은, 왕징웨이와 그의 추종자들인 이른바 화평파가 친일로 옮아간 동기(출발점)에는, 승산이 없어 보이는 장기적인 전쟁의 참화에서 중국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친일정권 성립 후에도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점이 분명히 확인된다는 것이다. -264~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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