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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징웨이 연구-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
배경한 |
가격: 30,000원
쪽수: 360
발행년/월/일: 2012.11.28
크기: 신국판
ISBN: 978-89-337-0636-7 93910
 
책머리에
들어가는 말―왕징웨이와 현대 중국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각
 
제1편 반만에서 반제로
Ⅰ. 신해혁명 시기의 왕징웨이와 반만민족주의
1. 혁명가 왕징웨이와 민족주의
2. 일본 유학과 동맹회 활동
3. 무정부주의의 영향
 (1) 섭정왕 암살 기도와 실패
 (2) 국사공제회 조직과 남북의화에서의 역할
4. 반만민족주의 주창과 그 의미
 (1) 반만민족주의 제기
 (2) 반만민족주의 실천과 한계
5. 반만민족주의의 의미
 
Ⅱ. 5·4운동 시기 왕징웨이와 반제민족주의―파리평화회의 관련 활동과 반제 인식 형성
1. 반만과 반제
2. 파리행과 평화회의 관련 활동
3. 국제 인식의 변화와 반제민족주의 형성
 (1) 평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이해
 (2) 무정부주의, 호조론의 영향과 반제 인식의 한계
4. 반제 인식의 형성과 그 한계
 
제2편 반제민족주의의 전개
Ⅰ. 국민혁명 시기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권력투쟁과 좌파 지도자 왕징웨이의 권력 한계
1. 왕징웨이, 장제스, 반제민족주의 
2.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권력투쟁, 중산함사건
 (1) 중산함사건, 그리고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관계
 (2) 장제스의 권력 장악과 왕징웨이의 외유
3. 북벌 개시 이후의 영왕운동 전개와 왕징웨이의 귀국
 (1) 영왕운동의 전개
 (2) 장제스의 대응
 (3) 왕징웨이의 귀국
4. 상하이담판과 장·왕 관계의 결렬
5. 왕징웨이의 권력 한계
 
Ⅱ. 국민혁명 시기 왕징웨이와 반제민족주의 실천
1. 국민혁명과 반제민족주의
2. 국민당의 개진, 개조와 반제 제기
3. 북상, 국민회의운동과 반제의 고양
4. ‘혁명외교’와 반제 실천의 한계
5. 반제의 좌절 
 
제3편 반제에서 친일로
Ⅰ. 중일전쟁 발발 전야 왕징웨이의 대일 태도―시안사변 전후의 친일 가능성 검토
1. 왕징웨이와 친일문제
2. 1930년대 전반 장·왕 연합체제와 ‘친일파’ 왕징웨이
 (1) 반장제스운동과 왕징웨이
 (2) 만주사변 이후 복원된 장·왕 연합체제와 왕징웨이의 대일 태도
 (3) 왕징웨이 피격사건과 친일파 논란
 (4) 장·왕 연합체제 중단과 대일 외교
3. 시안사변 이후의 장·왕 연합체제 복원과 대일 태도의 향방
 (1) 시안사변 발발과 왕징웨이의 귀국
 (2) 복원된 장·왕 연합체제
 (3) 대일 태도의 분기―장제스 국민정부의 ‘선항일’과 왕징웨이의 ‘후항일’
4. 친일의 가능성
 
Ⅱ.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화평운동과 왕징웨이의 친일 선택
1. 왕징웨이 중심의 화평운동을 보는 시각
2. 중일전쟁의 전개와 대일화평론 대두
3. 대일 화평 교섭 진행과 왕징웨이의 입장
4. 중광당회담과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5. 왕징웨이의 친일 선택과 그 배경
 (1) 장·왕 관계와 장제스 배제
 (2) ‘혁명외교’의 실패 경험과 국제정세 인식
 (3) 분공 경험과 ‘일치방공’에 대한 호응
 (4) ‘민족 구원’과 자기희생
6. 왕징웨이의 정치 경험과 친일
 
제4편 친일의 논리와 친일정권의 곤경
Ⅰ. 왕징웨이 친일정권과 대아시아주의의 변용
1. 왕징웨이 친일정권의 정당성 문제
2.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계승’
3. 대아시아주의와 동아연맹
4. ‘대동아전쟁’ 이후의 대아시아주의
5. 일본 중심의 아시아연대
 
Ⅱ. 일본 동아연맹운동 수용과 왕징웨이 친일정권
1. 왕징웨이정권과 동아연맹
2. 일본의 동아연맹론과 동아연맹운동
3. 중국의 동아연맹론 수용과 동아연맹운동
 (1) 중국의 동아연맹 단체 성립과 활동
 (2) 동아연맹중국총회 성립
4. 동아연맹론과 왕징웨이 친일정권
 (1) 동아연맹론과 대아시아주의의 결합
 (2) ‘정치 독립’ 모색과 좌절
5. 동아연맹론의 결말
 
Ⅲ. 왕징웨이 친일정권과 신민회
1. 친일정권의 곤경
2. 신중앙정부 수립 구상과 ‘정치 독립’
3. 신민회 조직과 구성
4. 신민회와 동아연맹의 갈등
5. 실패한 ‘정치 독립’
 
나오는 말―왕징웨이와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
1. 이 책의 내용 요약
2. 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과 의미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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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20세기 전반에 장제스(蔣介石)와 함께 중국 국민당정부를 이끈 왕징웨이(汪精衛)는 다양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그런 만큼 그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매우 다양하여, 쑨원의 오른팔, 공화혁명의 이론가이자 활동가, 전제군주제 타도를 주장한 급진주의자,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 섭정왕을 암살하려다 투옥된 테러리스트, 신해혁명의 영웅, 크로폿킨의 호조론을 숭앙한 무정부주의자,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서 장제스와 대립한 정치지도자, 그리고 결국 친일파로 변절한 민족 배반자 등으로 묘사되곤 한다.
『왕징웨이 연구―현대 중국 민족주의의 굴절』은 중국인들의 영웅이었으나 친일파로 변절한 혁명가 왕징웨이에 관한 국내 최초의 본격 연구서이다. 왕징웨이를 ‘민족 배반자’로만 평가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그를 재조명하는 한편, 그를 통해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폭넓고 다양한 면모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왕징웨이는 누구인가?―국내 최초의 본격 연구서
왕징웨이(汪精衛)는 20세기 전반의 중화민국사에서 쑨원(孫文)과 장제스 못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지도자이다. 당시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그는 일본 유학 도중 쑨원을 만난 후 공화혁명운동에 뛰어들어 혁명가이자 이론가로 활동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으나 혼란 속에서 위안스카이가 대두하고 각지에서 여러 군벌이 발호했으며 서구 열강과 일본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중국 내의 이권을 주장했다. 신해혁명 과정에서 혁명운동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중화민국이 성립한 후 제1차 국공합작 추진을 주도하고 국민당 좌파의 중심이 되어 우한(武漢) 국민정부를 이끌었으며, 장제스가 독재정치를 펴자 반(反)장제스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필생의 라이벌 장제스와는 사사건건 대립했다. 굴곡이 많았던 그의 정치적 일생은 곧 초기 국민당정부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여러 차례 정치·사상적으로 변화한 끝에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에 친일파로 전향하여 친일 괴뢰정권을 세우고 스스로 수반이 되었다. 이후 그의 이름은 ‘민족 배반자〔한간(漢奸)〕’의 대명사가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은 그를 민족 배반자로만 평가하는 단편적 논의에서 한 발짝 떨어진 시각을 제시한다.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왕징웨이의 정치적 일생과 사상의 흐름을 복원하는 한편, 당대에 나타난 여러 민족주의적 사상을 파헤치고 있다. 이를 통해 혁명운동의 영웅이었던 그가 어떻게 결국 친일파로 변화했는지를 다층적 시각에서 논의하고 있다.

격동의 중국사와 중국 민족주의의 이면
왕징웨이에 관하여 논의할 때 가장 민감한 문제는 그가 친일 괴뢰정권의 수반이 되었다는 점과 이를 둘러싼 평가 문제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왕징웨이의 일생과 사상은 중국 민족주의의 한 흐름을 대변한다. 그는 당대의 민족주의와 사상적 조류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많은 저술과 활동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이끌었다. 이 책은 민족주의자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그의 생애에 접근하여 사상과 정치활동의 구체적 실상을 밝히는 한편, 이러한 변화의 원인과 의미를 파헤쳤다. 또한 당시 중국에서 나타난 민족주의의 다양한 면모에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왕징웨이의 친일이 20세기 전반기의 중국이라는 특정한 시공간에서 그가 겪은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났음을 주장한다.

방대한 자료를 통해 드러난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갈등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숙명적인 갈등과 대립이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군사적 기반이 없었던 왕징웨이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 군벌과 장제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는 쑨원이 사망한 이후 급속히 당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운 장제스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둘 사이의 대립에는 국민당 내부의 분파들과 공산당뿐만 아니라 각지의 군벌과 심지어 소련까지도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장제스와의 충돌에서 언제나 패배했고, 그 결과는 잦은 외유로 나타났다. 그와 장제스의 대립과 협력은 그가 일본의 점령지로 탈출하여 친일파로 변절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장제스는 왕징웨이가 친일로 돌아서자 여러 번 그를 암살하려 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반목하고 충돌하는 양상을 방대한 자료를 통해 실증적으로 드러냈다.

이 책의 구성
제1편에서는 왕징웨이 민족주의의 출발점이 된 신해혁명 시기의 반만(反滿)민족주의와 1919년 전후의 5·4운동 시기 반제민족주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만주족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족 중심의 공화혁명을 이룩하자고 주장한 그의 민족주의 인식의 한계와 무정부주의적 성향, 반제 인식의 모순이 드러난다.
제2편에서는 현대 중국의 국민국가 성립 단계로 인식되는 국민혁명 시기에 나타난 왕징웨이의 반제 인식과 그 성격, 중산함사건을 통해 나타난 장제스와의 대립을 살펴보았다.
제3편에서는 왕징웨이의 반제민족주의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어떻게 친일이라는 정반대 방향으로 굴절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왕징웨이와 장제스가 여러 차례 연합체제를 이루어 국민당정부를 이끌었으나 끊임없이 반목하는 과정, 일본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편 왕징웨이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결국 친일로 돌아서게 되는 과정과 그 원인이 드러난다.
제4편에서는 왕징웨이 친일정권이 정권 유지의 핵심인 정치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들을 검토했다. 쑨원이 주창한 대아시아주의의 변용, 일본의 대중국 화평전략의 기초가 된 동아연맹론 수용과 활용, 그리고 만주국에서 통치이념 확립을 위해 설립된 친일단체인 신민회와의 관계 등을 논한다. 이를 통하여, 친일로 돌아선 왕징웨이 자신과 그의 친일정권이 겪게 된 민족주의의 왜곡과 정치적 곤경의 실상을 살펴보았다.
 
책 속으로
 
왕징웨이는 1905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쑨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혁명단체인 중국혁명동맹회의 핵심 구성원이자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의 주요 필자로서 공화혁명과 반만민족주의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시기에 왕징웨이가 주장한 민족주의는, 이후의 5·4운동 단계에 나타나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한 저항을 주된 목표로 삼은 이른바 반제민족주의와 비교할 때 종족주의라는 상당한 한계를 지닌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27~28쪽
 
신해혁명 이전부터 왕징웨이를 비롯한 혁명파와, 량치차오梁啓超가 중심이 된 입헌파가 가장 격렬하게 대립한 부분은, 혁명이 가져올 정치적 혼란과 이를 노린 열강의 침략, 그 결과 초래될 중국의 분할 가능성 문제였다. 열강의 중국 분할을 둘러싼 혁명파와 입헌파의 논쟁에서 입헌파는 혁명의 혼란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과분이 초래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미연에 피하는 방법으로 평화적인 개혁, 곧 군주제하의 입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를 비롯한 혁명파는 무능한 청조의 존재야말로 과분을 초래할 근원이기 때문에 청조를 타도해야 과분을 피할 수 있다고 공박했다.  -38~39쪽
 
1925년 9월 말경에 확립된 연합체제는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상호보완적 필요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가능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강한 신임에 의해 황푸군관학교 교장에 발탁됨으로써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광저우에서 그의 정치적 경력은 일천하였고 정치적 기반도 거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을 가진 동반자나 지지자가 절실히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왕징웨이도 광둥정권의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군사적 기반 세력인 장제스의 지지가 자신의 정치지도권 확립에 필요불가결했다.
-87쪽
 
독자적인 군사적 기반을 갖지 못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독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중산함사건 직후 왕징웨이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각 군의 영수들은 중립을 고수했고, 최후의 지지자로 여긴 보로딘과 소련 측도 왕징웨이의 입장을 지지해주지 않았다. 국민정부 주석이자 군사위원회 주석인 왕징웨이의 권위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의 낭만적 기질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그로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106쪽
 
왕징웨이 개인의 정치사상이나 정치행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대목은, 당시의 그가 기본적으로 이론가나 사상가라기보다 선전가 역할에 치우쳐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반제에 대한 수용과 고양, 실천의 각 단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이념적 창의성을 바탕으로 혁명이론을 제기하는 역할을 감당했다기보다 국공합작 노선이나 북상, 국민회의운동, 북벌과 같이 주어진 정치적 상황 속에서 코민테른과 공산당이 제기한 반제 노선을 적극 수용하고 전개하는 선전가 역할을 주로 했다.   -127쪽
 
왕징웨이는 기존의 안내양외와 ‘일면저항 일면교섭’을 고수하여 장제스 혹은 국민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그의 주장은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그리고 그 전쟁에서 중국의 승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 경우 일본과의 평화교섭에 나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했다. 즉, 항일전에 대한 그의 입장은 전쟁 상황에 따라 대일강화 또는 친일 전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띠고 있었다.  -170쪽
 
1937년 7월,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7·7사변)으로 중일 간의 전면전이 발발한 뒤 6개월도 못 되어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창장 강 중류의 거점 도시 우한으로 옮아가야 했고, 국가 존망의 위기는 극에 달했다. 앞에서 지적했듯 중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장제스와 왕징웨이를 비롯한 국민정부 지도자들은 일본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부저항주의로 알려진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 대일 전략의 바탕에는 군사력에 대한 이러한 일관적인 평가와 인식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장제스와 왕징웨이 등은 ‘일면저항 일면교섭’과 장기항전론을 제기했던 것이다. 따라서 1938년 10월 광저우와 우한 함락을 전후하여 전쟁의 장래에 대한 비관론이 국민정부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자, 일본과 협상하여 강화조약을 체결하자는 이른바 화평론이 대두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171쪽
 
‘협의기록’은 이른바 ‘신정부’ 건설 절차도 규정했다. 일본 정부 측이 중일 간에 합의한 시국 해결 방침을 발표한 다음 왕징웨이와 중국 화평파 인사들이 장제스와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하고 동아신질서 건설을 위한 중일 제휴와 반공정책을 공동으로 발표하며 신정부 성립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최종 협의기록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협의 과정에서 중국 측이 기존의 친일정권인 베이징의 임시정부와 상하이의 유신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 영도하의 신정부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또한 왕징웨이가 충칭을 떠나 화평협상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 동시에 장제스 휘하의 충칭 국민정부군(중앙군)이 왕징웨이를 편들게 될 쓰촨, 윈난의 군대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펴 중앙군의 후방을 끊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81~182쪽
 
장제스가 왕징웨이의 탈출 사실을 안 것은 12월 21일 윈난 성장 룽윈의 12월 19일자 전보를 받고나서였다. 룽윈의 보고는 “왕징웨이가 18일 쿤밍에 왔다가 19일 오후에 하노이로 떠났는데, 떠나면서 일본 측과 화평을 약속했다는 사실을 실토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보를 받은 장제스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일찍이 없었던 국가적 위기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은 채 공산당과의 합작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혼자 떠나 당과 국가를 돌보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혁명당원이 할 행동이 아니지 않은가? 비통하고 안타깝다. 오로지 자성하고 돌아오기만을 바란다”라고 일기에 기록했다.    -184~185쪽
 
왕징웨이가 화평운동으로 기울어지게 데에는 그의 정치 일생에서 확인되는 여러 경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쑨원 사후 끈질기게 이어진 장제스와의 권력투쟁에서 맛봐야 했던 좌절과 패배, 국민당 좌파의 지도자로서 경험한 공산당과의 합작 실패와 그로 인한 철저한 반공, 국민혁명 시기에 경험한 반제 실천의 한계와 그로 인한 반제 실천으로서의 항일에 대한 좌절감과 무력감, 혁명을 위한 무정부주의적 자기희생 등은 바로 이러한 경험적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측면들이다.  -259쪽
 
신해혁명 발발 이후 오족공화론을 수용하며 나타난 반만민족주의의 변화 과정에는, 전통적 중화주의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족 중심의 종족적 민족주의로는 변경 지역들의 독립 요구로 표면화되고 있던 ‘과분의 위기’ 속에서 국내 민족들 간의 진정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역사적 경험이 내재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국 내 민족들 간의 대립과 모순이 완전히 해결될 수는 없었다. 쑨원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1920년대 이후에도 한족 중심의 민족융화 주장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거듭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반만민족주의가 가지는 종족주의로서의 한계, 즉 중화주의적 잔재의 청산은 오늘날까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262~263쪽
 
왕징웨이의 정치 일생이 보여주는 민족주의의 변화 과정이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기본적인 흐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반만에서 반제로, 다시 반제 실천의 좌절로 변화한 과정이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본류를 구성한다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하다. 이에 비하여 왕징웨이 정치 일생의 최후 단계에 해당하는 친일 전변을 중국 현대 민족주의의 흐름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나의 흐름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진행되었고 앞으로도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 책에서 강조한 점은, 왕징웨이와 그의 추종자들인 이른바 화평파가 친일로 옮아간 동기(출발점)에는, 승산이 없어 보이는 장기적인 전쟁의 참화에서 중국 민족을 구하겠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친일정권 성립 후에도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 점이 분명히 확인된다는 것이다.  -264~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