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저자는 가능한 한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C. G. 융 자신의 언어로 이 심리학설을 소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저자가 받은 분석수련과 현재까지의 이 방면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주관적인 견해가 그의 학설을 소개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저자가 이해했고 저자의 경험을 통하여 동화시킨 분석심리학설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9쪽
정신분석학파와 달리 분석심리학에서는 본래 학파가 구분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융의 학설이 하나의 가설로서 그 절대성을 지키도록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정신치료의 장에서도 치료자의 기본자세를 치료방법보다 더 중요시하였기 때문에 방법의 차이나 가설의 보충이 학파를 형성해야 할 계기를 만들지 않았다. 어쩌면 융의 가설은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심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원형적(原型的) 산물(産物)이므로 그 대극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그 다양한 확충(擴充, Amplification)을 통한 확대와 심화(深化)가 필요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분석심리학은 경험심리학이며 하나의 가설이며 그 효용성은 오직 정신요법의 현장에서 그 가설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는 융의 입장에 따라 가설은 언제나 어디서나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다고 한다면, 융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경험을 통하여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으며 그러한 다양성을 촉구하고 허용하는 데 융 사상의 특징이 있다. -56~57쪽
무의식이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프로이트가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의식으로부터 억압되어 생긴 것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에서는 일단 의식되었던 것이 억압되어 이루어지거나 특히 억압이라는 기전이 작용함이 없이 단순히 잊어버렸거나 워낙 의식에 주는 영향이 미미해서 의식되지 못한 모든 심리적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층이 있는가 하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의식에 의해서 그것이라고 인식되지 못한 채 정신작용에 여러 가지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부분이 있다. 전자는 그 내용이 개인의 출생 이후의 특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개인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뜻에서 ‘개인적 무의식’이라 부르며, 후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해서 집단적 무의식(또는 보편적 무의식)이라고 부른다. -74~75쪽
이렇게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면 결국 무의식성이란 없어지고 완전히 깨달은 상태가 되어 전인이 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무의식은 끝없는 세계이다. 아무리 의식화해도 미지의 세계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언제나 ‘나(자아’를 넘어선다. ‘나’는 오직 그 커다란 원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아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융은 자기실현은 반드시 완전해지는 것이기보다 비교적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한다. -140쪽
분석심리학은 학문이지 세계관이 아니다. 학문이 곧 세계관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분석심리학은 환자에게 이미 만들어진 세계관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관을 구축하거나 개조할 수 있는 재료나 수단을 제공한다. 분석심리학이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적인 세계의 인식과 그것이 지닌 창조성이며, 그 밑바닥의 원천을 이루는 합리적으로도 파악하기 힘든 신화의 세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다. “영원성, 원시인의 생활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영원성이 우리의 삶에는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우리는 합리주의의 장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올림으로써 자연의 영원성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분석심리학은 합리적인 이성이 비난했던 무의식의 환상적인 내용들을 다시 발굴함으로써 이 장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이 상들은 장벽 너머에 있으며, 그것들은 우리 속의 자연, 즉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231~23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