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병제兵制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 한군데에 모여 있는 것으로는,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를 첫손으로 꼽아야 할 것이다. 고려 병제의 대강을 파악하려고 하는 경우에, 우선 이 『고려사』 병지를 뒤적여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또 후대의 고려 병제에 대한 저술들-예컨대 『문헌비고文獻備考』 중 ‘병고兵考’의 고려에 해당하는 부분 같은 것-이 대체로 『고려사』 병지에 의존하고 있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만큼 고려의 병제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는 이 병지에 대하여 대체적인 이해를 가져두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고려사』 병지에 대하여는 그 서문에 찬자撰者의 편찬 의도가 표명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선 서문을 여기에 인용하여 이 병지에 대한 검토의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A. 병兵이란 포악한 것을 막고 어지러운 자를 베는 것이니, 천하와 국가를 가진 자(帝王)가 진실로 폐할 수 없고, 병제兵制의 득실에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다. B.(1) 고려 태조太祖는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비로소 6위衛를 두었는데, 위衛에는 38영領이 있고, 영領은 각기 1,000명이었으며 위와 아래가 서로 연결되고 체통이 서로 속하니 당唐의 부위제府衛制에 거의 가까웠다. (2)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 동여진東女眞이 말썽을 일으키자, 이에 더욱 단단하게 방위에 힘쓰고 날마다 군사 훈련을 일삼아 드디어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였는데 산관散官·이서吏胥로부터 상인(商賈)·천예賤隸·승려(緇流)에 이르기까지 예속되지 않음이 없었다. 이는 비록 옛 제도와 합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한때 이를 써서 성과를 거두었음은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있었다. (3) 의종毅宗·명종明宗 이후에 권신權臣이 정권을 쥐자 병권兵權은 밑으로 옮아가 용감한 장수와 강한 병졸이 모두 사가私家에 속하게 되고, 나라에 바야흐로 외적의 침략이 심해지는 일이 생겨도 공가公家에는 1여旅의 군사가 없게 되고, 갑자기 급한 지경에 이르면 기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여러 방면으로 징발하였는데, 혹은 서울에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으고, 혹은 문무文武의 산직散職과 백정白丁·잡색雜色을 점고하고, 혹은 4품 이상 (관리의) 가동家을 뽑고, 혹은 가옥 칸수의 다소로써 차이를 두기도 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이에 이르면 비록 위태롭지 않기를 바라더라도 되겠는가. C.(1) 국가의 대사는 군사軍事에 있으니, 그 제도가 진실로 의당 자상히 갖추어졌을 것이로되, 이전의 사적史籍이 자세하지 못함을 애석해한다. (2) 지금 특히 상고할 수 있는 것을 기록하니, 병제兵制, 숙위宿衛, 진수鎭戍, 간수군看守軍, 위숙군圍宿軍, 검점군檢點軍, 주현군州縣軍, 선군船軍, 공역군工役軍이다. 그밖에 참역站驛·마정馬政·둔전屯田·성보城堡도 역시 병兵의 부류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아울러 붙여서 병지兵志를 만든다.
- <머리말> 15~1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