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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조선통치와 국제관계-조선독립운동과미국 1910-1922
나가타 아키후미 | 박환무 |
가격: 30,000원
쪽수: 504
발행년/월/일: 2008.07.15
크기: 신국판
ISBN: 89-337-0540-7 93910
한국의 독자들에게
서론   국제정치사에서 본 삼일운동
       문제 제기 | 국제정치사에서 본 삼일운동
제1장  한국병합과 무단통치
       한국병합과 무단통치 | 무단통치와 미국 | 재미 조선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운동
제2장  백오인사건과 독립운동
       백오인사건 | 미국과 일본의 대응 | 미국과 일본 간 사건 마무리 | 백오인사건과 독립운동
제3장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논쟁
       민족자결주의 제창 | 민족자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제4장  민족자결주의 수용과 대응
       재중 조선인의 수용과 대응 | 재미 조선인의 수용과 대응 | 재일 조선인의 수용과 대응 | 러시아령 거주 조선인의 수용과 대응 | 국내 조선인들의 수용과 대응
제5장  삼일운동의 발발
       고종의 죽음 | 도쿄 이팔독립선언 | 민족주의세력의 결집에서 삼일운동으로
제6장  독립을 향한 외교활동
       위임통치청원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 파리강화회의와 김규식 | 러시아령과 중국에서의 외교활동
제7장  삼일운동과 미국의 반응
       삼일운동의 발발과 미국인 선교사 | 삼일운동의 진압과 미국인 선교사 | 미국인 선교사와 조선통치의 개혁 | 미국 의회와 조선문제 | 미국 언론계의 반응
제8장  일본의 삼일운동 진압실태
       삼일운동의 발발 | 삼일운동의 확대 | 삼일운동의 진정화
제9장  삼일운동과 일본의 대응
       삼일운동의 발발과 일본의 대응 | 삼일운동 진압과 조선통치의 개혁 모색 | 조선통치 개혁을 둘러싼 줄다리기 | 삼일운동과 일본 언론계의 대응
제10장  문화정치와 사이토 마코토
        사이토 폭살미수사건 | 문화정치의 실시 | 미국의 반응
제11장  삼일운동 이후의 독립운동
        문화정치 실시 이후 조선의 정세 | 혼춘사건과 간도출병
제12장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 | 미국의원단의 조선 방문 | 미국의원단의 일본 방문
제13장 워싱턴회의와 독립운동
        하딩의 대통령 당선 | 하딩 대통령과 독립운동 | 워싱턴회의와 독립운동 | 워싱턴회 폐회
제14장  극동노동자대회와 독립운동
        볼셰비키와의 제휴 | 극동노동자대회에 파견된 조선대표 | 극동노동자대회와 조선독립 | 극동노동자대회 종료
결론  조선독립을 둘러싼 국제관계
        민족자결주의와 독립운동 | 독립운동의 성과와 문제점 | 일본의 대응 | 미국의 대응

미주 | 참고문헌 | 옮긴이 후기 | 찾아보기
이 책은 한국병합에서 워싱턴회의와 극동노동자대회까지 이르는 시기 동안 전개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국제관계와 3·1운동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특히 국제정치사의 관점에서 이 시기에 전개된 식민지조선·일본·미국 간의 국제관계를 한국의 독립운동과 미국의 대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데 주력했다. 이 책의 행간行間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미국은 왜 일본의 가혹한 조선통치를 묵인했는가? 일본은 어떻게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국제적으로 정당화했는가? 한국의 독립운동은 왜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했는가? 요컨대 저자는 한국독립운동의 분열을 낳은 국제정치의 각축전을 기술하면서 한반도에 역사적 비극을 초래한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에 대해 국제정치사가로서 설명할 책임을 다하고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해 독자들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어떻게 조선통치를 국제적으로 정당화했는가
조선(한국)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느꼈던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러 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영국과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한국문제에 영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없앴다. 또한 일본은 러일전쟁 중인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맺어 미국의 개입 가능성까지도 일단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06년 이후 미국과 일본 간에 몇 가지 대립이 나타나면서 미국이 조선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는 일본의 경계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3․1운동의 발발은 조선인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얕보던 일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일본은 도저히 조선 민중이 운동의 주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당국은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와 미국인 선교사를 3․1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믿어 격렬하게 비난했다. 더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반대로 일본의 요구가 거부되자 불만은 한층 강해져 3․1운동에 대한 잔학한 진압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진압에 대한 거센 국제적 비난에 직면한 일본은 조선통치를 개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열강이 일본의 조선통치 자체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사이토 마코토의 부임과 문화정치 실시로 사태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미국은 왜 일본의 가혹한 조선통치를 묵인했는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미국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미국은 105인사건과 3․1운동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일본의 지나친 행위는 주시했지만, 일본의 조선통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은 현실적 이해관계가 적은 조선문제 때문에 일본과 마찰을 빚는 걸 극도로 꺼렸고, 그래서 조선독립에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즉 일본과의 관계가 양호한 시기에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입장을 지지하고, 갈등이 생기더라도 일본의 조선통치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이 조선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의 본질이었다. 이는 당시 국제정치의 지배원리가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라는 이상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주의였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줄뿐더러, 미국에 기댄 독립운동가들의 외교활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왜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했는가
한국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이승만과 정한경 등의 위임통치청원으로 분화와 대립의 양상이 점점 깊어졌다. 이러한 대립의 근본 원인은 미국 등에 대한 외교공작이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더욱더 외교공작을 하자는 방법상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더구나 워싱턴회의에서 미국 등이 조선문제를 무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동노동자대회에서는 조선문제에 대한 지지를 적극 표명하자, 외교공작의 무의미함을 주장하면서 이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이 옳았다고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주의를 견지하면서도 볼셰비키와 제휴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고, 바로 이 시점에서 사회주의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의 분단을 초래한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즉 이 책에서 다룬 시기에 미국이 취한 조선정책에서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